기연재한 매거진 글을 우선적으로 업로드합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엄청난 고함 소리에 아이들이 모두 합죽이가 되었다.
곧 문이 열리고, 위압감을 풍기는 붉은색 후리스에 캐릭터 실내화를 신은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나이, 고3 언니들이었다.
"저희 수능이 5개월도 안 남았는데, 기숙사가 너무 시끄러워요. 제발 방문 좀 살살 닫으세요. 발망치 소리도 좀 내지 마시고요."
가장 날카로운 인상의 언니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중2가 고3 선배들을 직접 대면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언니나 오빠도 없었던 나는, 다섯 살 많은 그 선배들이 아예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 시기엔 부모님이나 선생님보다 선배들이 더 무서웠기에, 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인처럼 서있었다. 그 와중에 선배가 우리에게 경어를 쓰는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기숙사 맨 끝방, 음침한 기운을 풍기던 그 곳은 고3들의 공부방이었다. 우리 학교는 기숙학교에다 산골짜기에 있어 사교육을 받으러 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좋든 싫든 이곳의 학생들은 모두 자기주도학습으로 수능까지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고3들이 예민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곳 중학생들은 기숙사에 별도의 공부방이 없어 점호가 끝나면 방에 접이식 책상을 펴 놓고 공부를 했다. 고등학생들에게는 학년별 공부방이 있었지만 이 또한 개인 공간이 아니었기에 생활소음은 피할 수 없었다. <공부의 신> 드라마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을 푸드코트로 데려가 공부시키는 장면이 있었는데, 굳이 그런 극단적인 환경을 만들지 않아도 여기는 이미 소음에 무뎌지는 법을 배우는 훈련장이었던 것이다.
이런 비인가 대안학교는 검정고시를 통해 중고등학교 졸업을 인정받기 때문에 내신 부담이 없다. 그래서인지 선생님들도 아이들도 공부에만 몰두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했다.
우선 단점부터 말하자면, 드물게 고3 막바지까지도 학습 습관이 잡히지 못한 아이들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끌어주지 않는다. 자식인생을 누구보다 걱정하는 부모님과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 누가 매일 잔소리를 해줄 리도 만무하다. 또 하나의 현실적인 한계는, 검정고시 성적이 대학 입시에서 높은 내신만큼 유리하게 인정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같은 노력이라도 경쟁에서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분명히 존재했다.
반면 장점도 분명했다. 정규 교육과정을 그대로 밟지 않더라도 검정고시를 통해 빠르게 고등 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고, 원한다면 수능을 일찍 치르며 정시 준비에 집중하기에도 유리했다. 무엇보다 스스로 미래를 고민하며 공부를 선택한 아이들에게는 이 환경이 오히려 높은 집중력을 끌어내는 조건이 됐다.
나 역시 그랬다. 일반학교에서는 다 같이 학교에 가고, 끝나면 학원에 가고, 숙제를 하고, 시험을 치르면 됐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무도 나를 끌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다. 그 책임감이 나를 자연스럽게 책상 앞으로 데려갔다. 마찬가지로 중학생 때까지 장난만 치던 남자아이들도 고등학생이 되자 스스로 책을 펼치기 시작했고, 필요를 느껴 자발적으로 시작한 공부는 주입식 교육보다 더 빠른 속도로 좋은 성과로 이어졌다. 실제로 그중에는 단 3년의 집중적인 노력만으로 목표하던 대학에 당당히 합격한 친구들도 있었다.
한 학년이 12명뿐이어서 수업이 자연스럽게 맞춤형으로 진행된 것도 큰 장점이었다. 모르는 문제가 생기면 선생님을 붙들고 거의 1:1 과외처럼 질문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 대부분이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점호가 끝난 뒤 선생님 방을 찾아가 문제를 묻기도 했고, 대화가 길어지다 보면 어느새 인생 상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 아이들끼리 서로 도와주며 설명해주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면서 ‘교학상장’이라는 말처럼, 공부를 가르치는 게 내게도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아이들마다 진도도, 이해 속도도 모두 달랐기 때문에 그 차이를 인정하며 설명하는 과정에서 ‘소통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일반 학교를 다녔다면 내 몫의 공부를 하기도 바빴을테고 친구는 그저 경쟁의 대상이었을텐데, 이곳에서는 함께 성장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가끔씩 일반학교를 다니며 족집게 사교육을 받았다면 더 높은 수능점수를 받고, 더 좋은 대학으로 갈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인생은 한 번뿐이니 선택하지 않은 길을 끝까지 따라가볼 수는 없겠다. 확실한 건, 나는 대안학교에서 누구보다 충만한 십대를 보냈다는 것이다. 내겐 서울에서 손꼽히는 학군에서 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경쟁하던 경험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 두 시기를 비교해보면 대안학교에서 보낸 시간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공부만 하던 십대를 벗어나 다양한 아이들과 부딪히며 살아보고, 스스로 미래를 고민하고 개척해 나갔던 그 시기는 오늘의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학교 밖 청소년'이 되었다고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이 아니었다. 더 다양한 시각과 더 많은 경험을 가진, 조금 더 넓은 품을 가진 어른이 된 것이다. 높은 수준의 사교육을 받고 내로라하는 대학을 나온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며 살아가는 지금도, 내겐 그들에게 없는 충만한 십대가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