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건 틀린 게 아니니까

by cha

나는 범부가 되고 싶었다. 친구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애썼다는 뜻이다. 반에 처음 들어왔을 때 여자아이들의 수가 나를 포함해 홀수라는 사실이 괜히 신경 쓰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외톨이가 되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이 학교에는 일진도, 왕따도 없었다. 남녀를 나눠 선을 긋는 분위기도 없었고,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자연스럽게 섞여 어울렸다. 지금 돌아보면 서로에게 경어를 쓰도록 한 학교의 규칙이 한몫했을지도 모른다. 학생 수가 적어 무리를 만들기 어려웠고, 생활반경이 워낙 좁아 누군가를 따돌리기 힘든 구조이기도 했다. 전교생이 백 명 남짓한 작은 학교였기에 결국 서로에게 맞춰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 반은 그중에서도 유난히 독특한 구성원들이 모여 있었다. 나이 차이가 최대 네 살까지 났고, 청각장애를 가진 오빠도 있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자주 쓰러지는 친구도, 만화에 푹 빠져 사는 친구도 있었다. ‘나비’라는 상상의 친구와 함께 지내는 아이도 있었다. 유독 포용력이 좋았던 덕에, 허술한 가오에 사로잡힌 중2병 차열음까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귀가 잘 들리지 않던 오빠는 양쪽 귀에 보청기를 끼고 있었다. 말투도 어눌했고, 빠른 말이나 작은 소리는 잘 알아듣지 못해 우리는 늘 그를 먼저 챙겼다. 나중에서야 그가 상황이 불리할 때마다 ‘안 들리는 척’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래도 몸 쓰는 일에서는 누구보다 든든했다. 노작 시간이나 힘이 필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그 오빠가 필요했다.


몸이 약했던 언니는 요양을 위해 이 학교에 왔다고 했다. 몸 상태가 나빠질 때면 남자아이들 등에 업혀 기숙사로 내려가 며칠씩 방에만 머무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공부는 무척 잘해 이전 학교에서는 전교 1등을 했다고 한다. 나는 종종 침대 위에서 공부하던 언니에게 다가가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곤 했다. 언니는 글씨도 유독 예쁘게 썼는데, 지금 내 글씨에도 그때 내가 모방한 언니의 글씨체가 일부 남아 있다.


일본인처럼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던 친구는 일본 만화를 무척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는 오타쿠라고 놀림을 받았다지만, 이 학교에서는 한 가지에 깊게 빠진 아이들이 워낙 많아 전혀 튀지 않았다. 당시 학교에서는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전학 후 진도를 따라가지 못했던 나는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기숙사에서는 더 다양한 아이들을 만났다. 중학교 저학년 때는 고학년 언니들과 어울렸고, 고학년이 되어서는 여섯 살 어린 아이들과 같은 방을 쓰며 지냈다. 서로 다른 나이대의 고민을 듣고 나누는 시간이 낯설면서도 즐거웠다.


그 무렵, ‘다름’과 ‘틀림’은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전의 나는 주류에서 벗어나면 곧바로 ‘틀린 존재’가 되는 것 같아, 내 다름을 숨긴 채 무리에 끼기 위해 애써왔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정말 다양한 아이들이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고, 처음엔 낯설었지만 함께 어울리다 보니 그 다름 속에서 장점과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선생님께 괜히 센 척하며 “뭘 쳐다보냐”고 대들며 반항하던 내게도 “쟤 뭐야, 이상해.”라고 단정짓는 대신 “그땐 왜 그랬던 거야? 궁금해서.”라고 존중어린 호기심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어설픈 강함으로 무장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나도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선은 여전히 종종 편협했다. 그 사실을 또렷하게 깨닫게 된 계기가 하나 있었다. 부모님께 영어로 편지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한 친구가 한국어로 편지를 쓰겠다며 고집을 부렸고, 그것 때문에 수업시간이 지체가 되자 짜증이 난 나는 옆 친구한테 투덜거렸다.


"아 그냥 시키는대로 하면 되지... 왜 저래?"

"그럴 수도 있지."


그 친구는 가볍게 한숨쉬며 체념하듯 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 그럴 수 있는 거구나. 나는 그 친구가 아니니까, 그 친구만의 사정이 있을 수도 있는 거겠지. 그 말을 하는 친구의 모습이 연륜있는 어른처럼 느껴졌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은, 한국어 편지를 고집하던 그 친구의 부모님이 영어를 읽지 못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이상함’이라고 여겼던 행동 뒤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그 이유를 쉽게 보지 못했던 것은 타인을 이해하기보다 기준에 맞추어 판단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인간은 로봇이 아닌 이상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다. 공동체의 규칙에 맞춰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결국 개인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 존재다. 그래서 세상에 하나뿐인 ‘나’라는 존재가 존귀한 것이겠지. 그러나 사춘기 아이들은 쉽게 비교하고, 누군가를 따라 하며, 주류에서 밀려날까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은 자신의 내면으로 향해야 할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게 만든다. 그 두려움이 타인의 맥락을 이해하려는 시선보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판단을 앞세우게 만드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 결국 비슷한 어른이 되어버린다면—그렇게 똑같은 성공을 좇는 인생이라면—너무 허무하지 않을까?

나는 누구이며, 남들과 무엇이 다르고, 무엇을 더 좋아할까. 학교에서의 일련의 경험들은 내게 나 자신에 대한 고민을 던지게 해주었고, 이 시기에 내가 했던 고민은 훗날 어른이 된 내가 나만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데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이렇게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낼 수 있었던 학교의 힘은, 이 학교 특유의 ‘공동체 이벤트’ 덕분이었다. 전교생이 함께 고생하는(?) 행사들을 통해, “너나나나 여기서 같이 버틴다”는 묘한 동지의식을 심어주었다. 아침 점호와 구보, 같은 식사 시간과 취침 시간처럼 일상의 리듬을 맞추는 방식도 있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여름과 겨울에 열리던 두 번의 큰 행사였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패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최신 트렌드의 비싼 옷들은 이곳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대신 생활한복, 냉장고 바지, 후리스 같은 옷들이 환영받았고, 장화는 개인 필수품이었다. 처음 기숙사 신발장 한쪽을 가득 채운 장화를 봤을 때는 의아했다. 산골에 있는 학교니, 비 오는 날을 대비한 것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식사 당번을 맡아 다른 친구와 조금 일찍 기숙사를 나섰는데, 현관에 장화가 모두 바깥에 꺼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화는 왜 다 꺼내놨어?”


마침 다음 날 수업이 없다는 말까지 들은 터라 더 이상했다. 공부하느라 바쁠 고3들조차 그날은 보이지 않았다. 친구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일 알게 돼. 너 버릴 옷 있지?”


버릴 옷? 왜 버릴 옷을 가지고 있지? 내게 그런 옷은 없었다. 빌려주겠다는 친구를 만류하고, 아끼던 추리닝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 내 추리닝은 넝마가 되었고 나는 그 선택을 깊이 후회하게 되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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