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과 신앙에 대한 소고
중상위권 대학의 간호학과에서 수석을 하자마자, 미련 없이 편입을 했다. 경쟁으로 점철되어 있는 분위기에 질식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편입한 학교는 매년 입결이 떨어진다고 난리인 작은 기독대학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묵묵히 공부했고, 1년 간 평점 4.5를 받아내며 꿋꿋이 취업을 준비했다. 취준 시기가 늦은 탓에 지원할 수 있는 곳은 기독교 방송국 PD 자리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만족했다. 문화 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었고, 나 자체가 같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보다 오래 사회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한 내 주위의 '크리스천' 어른들의 말은 달랐다.
"더 좋은 데를 노려야지 왜 그런데를 가니?"
내가 굳이 그들을 '크리스천'이라 강조한 이유는 일반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언이 다른 무신론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는 점 때문이다. 혼란스러웠다. 작은 자리에 가서 섬기라고 배웠는데, 주어진 자리에 족하고 감사하라고 배웠는데, 모든 일에는 주님의 뜻이 있고 길이 있다고 배웠는데, 아니었나..?
돌이켜 보면 '왜 그런데를 가냐'는 말은 늘 내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말이었다.
"아깝게 왜 그런데를 갔니?"
간호학과에서 공연영상학과로 편입을 한 내게, 목사님도 선교사님도 하나같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의연히 2년을 버텨냈지만, 우습게도 취업을 준비하는 근 몇 달 간은 그들의 시선과 말투가 얼룩처럼 남아 나를 괴롭혔다.
"너는 더 큰 가능성이 있는데."
분명 나를 높이 평가하는 말이었으나, 나는 오히려 자괴감에 빠졌다. 그들의 말을 듣고 주위를 보니, 정말 실력보다 좋은 곳에 취직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들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는데 나만 끊임없이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왜 하나님은 항상 나를 낮은 곳에만 보내시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은 곧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 기독교 방송국 입사가 초라한 멍에처럼 느껴졌다.
'처음부터 작은 곳에 들어가면 나중엔 기회가 없지 않을까'
'정말 취준을 더 해서 더 좋은 곳을 노려야 하나'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자책과 원망의 날을 보내던 중, 습관처럼 성경을 읽다 평소에 들어오지도 않던 구절 하나가 눈에 밟혔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요 8:15)
순간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내게 조언을 하던 그들의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그들이 '왜 가냐'라고 말하는 '그런 곳'은 어떤 곳인가. 월급이 적은 곳? 불안정한 곳? 규모가 작은 곳?
그들의 말에 정처 없이 흔들리던 내 삶의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을 원망하게 한 것은 자괴감이 아닌 은연중에 높아진 나 자신의 자만함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었던 사실이 생각났다. 나는 원래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떤 것도 하지 못했던 사람이라는 것. 그렇기에 내가 가능성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자체가 은혜이며, 어디에 입사를 하든 그것 또한 내겐 벅찬 축복이라는 것.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저, 그저 지금처럼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노력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이미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낫다.'는 말로 현실을 자위하곤 한다. 나 또한 다를 바 없으나, 이번 일로 새롭게 배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시선에 조금 더 집중하는 법이다. 내가 있는 사회적 자리가 어디든,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라면 그것이 가장 성공한 자리가 아닐까.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시 84:11)
그러니, 따지고 보면 무엇이 용이고 무엇이 뱀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