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다는 것이 괜찮다는 건 아닌데

by cha

필리핀에서의 하루는 규칙적으로 흘러간다. 아침에 일어나 구보를 하고,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잠시 쉬었다가 수업을 시작한다. 영어 수업은 현지인 교사들이 진행했다. 서툰 영어였지만 그들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틀린 문장으로도 말을 꺼내는 일이 덜 두려워졌다. 돌이켜 보면 영어실력에 있어 가장 큰 변화는 문법이나 발음이 아니라, 외국인을 마주했을 때 주저하지 않는 태도였던 것 같다. 유학을 하면 영어가 는다고들 하는데, 어쩌면 그 말의 절반쯤은 이런 자신감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몰래 학교 담장을 넘어 간식을 사러 간 '싸리싸리'에서도, 봉사활동을 하는 곳에서도 우린 현지인들과 가까이 지냈고, 그 경험은 분명 도움이 됐다.


쉬는 시간이 되면 농구공을 튕기며 놀거나, 기타를 들고 마당으로 나간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통기타를 배웠다. 바닥에 둘러앉아 기타를 치고 함께 노래를 부르던 시간이 참 좋았다. 그마저도 지치면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작사작곡을 하기도 했고, 짧은 소설을 써서 돌려읽거나, 일기를 썼다. 핸드폰도 없고 마땅한 놀거리도 없어 찾은 시간때우기 방법이었는데, 돌아보면 그 시간 덕분에 꾸준히 기록하고 끝없이 상상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해진 것은 영어나 창작활동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벌레에도 점점 익숙해졌다. 자고 있는데 거미가 무릎 위를 기어가기도 했고, 샤워를 하다 등에 바퀴벌레가 붙어 있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적도 있었다. 특히 우기가 시작되면 상황은 더 심해졌다. 며칠씩 비가 이어지면 습기가 방 안까지 스며들었고, 환기를 위해 문을 열어 두면 벌레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처음에는 기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바퀴벌레를 밟아 죽이거나 손바닥만 한 나방을 잡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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