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onZ Feb 27. 2022

인재인가 인력인가

소프트웨어가 되고 싶었던 하드웨어

취업을 한 지 1년이 지났다.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방학 없는 삶을 살아보니 오히려 시간이 더 빨리 가는 느낌이다. 작년 이맘때쯤 회사 적응을 위해 아등바등하며 조급해했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몇 달 전 생애 첫 연말정산을 하며, '내 소비도 성적표를 받는데 나도 내 1년에 대한 연말정산(?)을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었다. 그렇게 1년 간의 희로애락과 깨달음을 총집합해 낸 내 성적표는, 한 줄로 요약된다. 


나는 인력이었다.  


우리는 다음 주에 있을 행사 준비로 부산했다. 내게 주어진 행사는 아니었기에 나는 언제나처럼 별다를 것 없는 내 업무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떤 팀장님이 내게 행사 준비를 같이하자고 통보해왔다. 허락은 내 팀장님께 받았으니 데려가겠다는 것이다.


자리에 앉았는데, 기분이 나빴다. 화가 나서 숨이 가빠지는데, 스스로가 더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왜 화가 날까. 나는 늘 도움이 되길 원했는데. '회사에서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회사에서 나에게 새로운 일을 시켜주면 좋겠어!' 내가 늘 외치던 소망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게 바로 나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 아닐까? '아니야.' 머릿속의 내가 말했다. '너는 그냥 인력이지.' 


그제서야 해소되지 않던 답답함의 이유를 알았다. 나는 인재가 되길 원했던 것이다.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작은 메모장에 수없이 적어놓고,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고 1년을 바랐다. 아이디어에 살을 붙여 결과물을 내기도 했지만, 고작 결재 하나가 보류되는(잊히는) 경험이 쌓일수록 내 좌절감도 쌓여갔다. 소프트웨어는 위에서 돌리고, 아래는 모두 임시적인 하드웨어 같았다. 행사를 돕는 것도 그저 부족한 일손을 보충하려는 인력이 필요했을 뿐, 내 기획이나 아이디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개인 업무를 고려하지 않고 통보해오는 방식도 결국 '인력 사고'의 일부가 아닌가. 아무도 관심이 없는 기회를 달라고 소리치는 작은 부품. 그게 1년 간의 나였다.


며칠 전 생일을 지냈다. 아직 기회가 가득한 나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기회를 1년 간 거부당하며 자존감이 낮아진 나로서는 마냥 설레는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저 슬픔 속에 쓰러져 있기엔, 사랑할 것들이 더 많으니 나는 다시 일어나야 한다. 혼자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연극을 올렸던 모든 업무 외 경력들이 사실 그저 부품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발버둥이었던 것 같아, 나는 어떻게든 변화해야만 했다. 


그래서 공부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공부는 이제 끝이라며 기세좋게 졸업한 게 1년 전인데, 퇴근 후와 주말에 책을 들어야 하는 삶이라니. 감상이 썩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현실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끊임없이 꿈꾸게 한다. 아픈 현실이 원동력이 되어주는 아이러니. 역시, 세상도 나도 삶도 알다가도 모를 것 투성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사람은 화가 나면 자판을 때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