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에게 무시당하는 선배
수많은 직장인들이 낸 사직서, 개인 사유라는 이유 뒤에는 의외로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뿌리내리고 있다.
처음으로 업무 외의 시간에 만나 저녁을 먹었던 타 부서의 팀장님과 과장님이 해주신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내가 혹여 관계 때문에 회사를 떠나지 않길 바라 주었다.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A와 나는 사이가 좋지 않다. 연말에서 연초로 넘어가는 첫날, 우리는 악연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앞서 다룬 바 있다.
그를 미워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서로가 불편한 사이가 되면 팀 분위기를 망치게 될 테고, 어차피 같은 팀이니 얼굴 볼 일도 많기 때문에 서로에게 독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인사도 받지 않았고 말도 걸지 않았으며 마치 투명인간을 대하듯 내 존재를 지웠다. 업무 상의 일로 말을 걸면 시선은 모니터에 꽂혀있을 뿐, 결코 마주하는 일이 없었다. 그가 실수한 일도 마치 내 잘못인 양 '아 알았어요'라는 식으로 짜증을 내며 무안하게 만들었다. 팀 분위기도 전과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A는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자신이 싫어하는 상사를 두고서는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라며 욕에 가까운 불평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 소리를 옆에서 듣다 보면 자연스레 기분이 나빠지고 속이 상한다. 그도 내 욕을 저렇게 하겠지. 나이는 나보다 많아도, 그가 내 뒤로 들어온 후배라는 사실은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든다. 어느 날부터인가 A와 내 입사동기인 B는 따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형 동생 사이로 부르며 친분을 쌓은 그들은 서로의 집도 자주 들락거리는 사이가 되었다. 자연스레 나는 직급이 있는 팀장님들과 과장님과 함께 점심을 했다. 쪽수로는 내가 더 많은 분들과 먹는데, 어째서인지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B와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아니었다. B는 A와 어울리면서도 나와 멀어지는 건 원치 않아했다. 그래서 A가 일찍 집으로 간 날이면 '그런 의도 아닌 거 알지?'라는 투로 위로를 하려 나섰다. 그 모습도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어느 날 B는 내게 자신의 서러움을 토해냈다. A가 나를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자신의 업무가 가진 권력으로 B의 위에서 간악하게 군림하고 있다는 것도, 자신보다 형이고 먼저 들어온 B가 단지 정사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선배라고 부르라며 깔본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날 B는 A에게 큰 무시를 당한 것이 충격이었는지 내게 평소보다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A와 밥을 먹으러 갔다. 마치 서로의 편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헐뜯고 다시 붙어먹는 학창 시절의 정치질을 보는 듯했다. 사회란 원래 학교생활과 다를 바 없는 것일까. 그 학생들이 그대로 사회에 나오는 것일 테니,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유튜브에 '직작인 우울증'이나 '직장인 왕따'를 치면 수천 개의 영상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이런 유치한 편 가르기 또한 특정 회사의 현상도 아닌 것 같다.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피할 용기도, 맞설 용기도 없는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중이다. '피할 수 없는 관계'와 같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마치 중앙선을 넘어 돌진하는 덤프트럭이 덮치는 것처럼 속수무책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을 감는 일 밖에 없다. 욕을 할 힘도, 한탄의 눈물도 나오지 않는 체념이다. 그렇게 한없이 수렁 속에 빠져들어가다, 악몽에서 깨어나듯 숨을 몰아쉬며 아침을 맞이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회사에서는 부품이 되었고 관계는 상처와 불신만 쌓여간다. 그렇지만,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나를 아껴주었다. 주말이 어땠느냐고 물어봐 주었고, 생일 선물을 챙겨 주었다. 저녁을 사주며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고, 아낌없는 칭찬과 배려를 해주는 사람들이 내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조차 방패를 세울 만큼 마음에 빈자리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바람이 가득 들어와 헛배부른 사람처럼 갑갑하다. 이 바람이 그친다면 고른 마음밭에 은혜 입은 그대들 이름을 하나하나 심어두어야지.
때로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게 바람을 이겨내는 방법이니까.
죽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지나가리라는 믿음으로 흔들리는 중이다. 삶의 뿌리를 움켜쥐고, 피어날 봄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