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케빈에 대하여>
도리스 레싱의 소설 <다섯째 아이>는 자녀의 폭력성을 마주한 부모에 대해 이야기한다. 완벽할 것만 같던 삶에 다섯 번째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로부터 그들의 삶은 완전히 망가지기 시작한다. 세상에 아이를 선택할 수 있는 부모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지나친 폭력성 즉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띄고 있다면, 그래서 그들의 삶에 실질적인 위험을 끼친다면 어떨까. 이 소설은 그런 상황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유형을 보여준다. 아이를 사회 시설에 격리시키자는 쪽과 그럼에도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아이를 양육하겠다는 쪽. 두 선택지 모두 개인의 감당이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후자의 선택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어느 누가 그 선택을 남에게 강요할 수 있을까.
소설과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해보고자 한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소년과 그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케빈은 보는 내내 불편할 정도로 악의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엄마를 무시하고, 상처될 말을 의도적으로 내뱉으며 더 나아가서는 어린 동생에게 해코지를 가한다. 엄마는 끊임없이 그에게 다가가려 노력하지만 그는 이미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듯 점점 더 거리를 둘 뿐이다. 영화 내내 케빈이 가장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는 그의 엄마인 '에바'다. 그래서일까. 케빈은 그녀만 제외한 채,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학교 친구들을 죽이고, 자신의 아버지와 여동생을 죽인다. 케빈은 그럼으로써 에바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고쳐지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영화 내내 에바의 노력은 안쓰럽기만 하다. 사람들은 에바를 향해 손가락질하지만, 과연 이 모든 상황이 그녀의 잘못일까. 자식의 잘못을 부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얼마나 정당하며, 얼마나 용인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케빈의 반사회적 행동이 에바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지만, 나는 그런 의견에 쉽사리 공감할 수 없다. 언제나 그렇듯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전부 그렇게 자라나는 것은 아닐뿐더러, 영화 내내 에바의 사랑이 부족했다고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바는 자신의 아들을 끝까지 감당하며 키워냈다. 때로는 타일렀고, 때로는 혼도 냈으며, 때로는 사랑을 아낌없이 주면서 그를 돌봤다. 이 영화에서 그녀가 비난받는 이유는 단지 그를 그녀의 자식으로 낳고 길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비난받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자신의 아들을 버렸어야 했을까? 글쎄, 쉽게 대답할 수도 없고 쉽게 대답해서도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에바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듯, 교도소에 가서조차 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놈의 사랑이 뭐길래. 교도소 안에서 그녀가 케빈을 꽉 안아주는 장면은 부모의 사랑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그토록 자신을 미워한 자녀에게 아직도 줄 사랑이 남았다는 것은, 그녀가 단지 그를 낳았다는 이유 때문일까. 정말 그 이유만으로도 에바는 자신을 죽도록 증오하는 이 아이를 그토록 세게 껴안아 줄 수 있었던 것일까.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사랑이 있다. 자신을 떠나려고 마음먹은 연인에게 끝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못살게 구는 부모에게 끝없이 효도를 하는 자녀도 있다. 에바처럼 자신을 증오하는 자녀에게 끝없는 사랑을 주는 부모는 더없이 많은데, 중요한 점은 이런 사랑의 대부분이 '주는 사람'의 죄책감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에서도 이 영화에서도, 끝까지 자식을 품은 부모는 결국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는 상황에서 그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게 된다. 내가 잘못해서, 내가 잘못 키워서, 혹은 내가 그를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해서. 주변의 손가락질을 자신의 몫으로 돌리고 끝까지 자녀를 품는 부모에 대해 나는 아무런 비난을 하고 싶지 않다. 어쩔 수 없는 사랑이 있듯이,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과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끝없는 사랑과 그로 인해 초래된 상황을 마주하며, 다시 한번 인간의 무력함을 생각해보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 끝없이 변화를 시도해보는 일, 그럼으로써 계속해서 좌절하고 주저앉는 일은 슬프지만 가장 위대한 일이 아닌가 싶다. 영화의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에 대해 집중했고,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의 삶을 생각했고, 그녀의 기분을 생각했고, 그녀의 미래를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의 제목이 '케빈에 대하여'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그녀의 삶 곳곳에 케빈에 대한 사랑이 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삶은 케빈을 생각함으로써 이루어지고, 그녀는 아직도 케빈을 사랑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