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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이 Oct 01. 2021

어제의 왕관을 내려놓는 일

영화 <블루 재스민 Blue Jasmine>

'오글거리다'라는 말이 쓰이게 된 이후로 SNS에 감성적인 글을 올리면, 사람들은 그것을 감성이 아니라 오글거리는 것으로 판단했다. 누군가의 진심이 사라졌고, 그것은 한낱 우스갯거리로 소비되기도 했다. '꼰대'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한 때는 누군가의 진심 어린 조언이었을 말이, 이제는 그저 꼰대 같은 말로 변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어른들은 꼰대 같아질까 봐 조언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젊은 세대는 조언이 튀어나오면 그걸 바로 꼰대라는 단어로 비꼬아버린다.  


그래서 나는 위의 두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진심을 무시하고 가볍게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나도 때때로 사람을 만나다 보면, '아, 이 사람 정말 꼰대 같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참 이중적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하나 꼽자면, 바로 '내가 과거엔~'으로 시작하는 말이다. 과거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사람은 많다. 내가 과거엔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 얼마나 돈이 많았는지, 얼마나 예뻤는지... 등등. 하지만 중요한 건 그 과거에서 빠져나와 현재를 사느냐, 혹은 그 과거에만 갇혀 있느냐의 여부다. 때때로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에 취해 현재를 후회로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 그랬다면~ 지금은 이렇게 안 됐을 텐데' 전부 부질없는 말이다. 현재를 충실히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바쁘다. 화려한 왕관을 쓰고 견디는 것도 좋지만, 시간이 지났다면 왕관을 제자리에 다시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재스민은 왕관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재스민은 한 때 남편의 사업이 번창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남편의 바람과 외도가 밝혀지며 정신적으로 피폐한 삶을 살게 된다. 거기에 더불어 남편의 사기행각까지 밝혀지면서, 물질적으로도 상당히 가난한 빈털터리의 삶으로 내쫓기게 된다. 재스민은 한때 자신이 무시했던 여동생 진저의 집에 신세를 진다. '참 불쌍한 애'라고 생각하던 그녀의 집에, 이제는 그녀보다 못한 처지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재스민의 태도는 영 뻔뻔하기 짝이 없다. 무일푼이 된 상태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자랑하며, 진저의 삶을 폄하한다.


재스민은 다시 괜찮은 남자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삶을 바꿔보려고 하지만 이조차도 쉽게 통하지 않는다. 언제나 진심이 없는 무언가는 들통이 나게 마련이니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연애가 잘 풀리지 않을수록, 진저의 연애에 훼방을 놓고 무시하는 일을 반복한다. 말로는 '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진정으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너의 행복을 무시함으로써 나의 처참함을 조금이나마 감춰 보겠다는 초라한 방어적 행동일 뿐이니 말이다. 영화가 엔딩으로 달려갈수록, 재스민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당사자인 그녀만큼이나 답답하고 혼란스럽다. 과거의 왕관에 완전히 짓눌린 채 어떻게든 자신을 지켜보려고 하는 그녀의 발악이 안쓰러웠기 때문일까. 영화는 재스민이 최악의 상황이 다다랐을 때 끝이 난다. 별다른 결말 없이 크레딧이 올라간다. 과연 그녀는 그 뒤로 행복해졌을까?


어떤 사람에게 과거는 쉽게 안 잊혀져요


과거를 잊는 방식은 모두에게 다르다. 그리고 재스민은 그렇게 처절한 방식으로 자신의 과거를 잊어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꼰대'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과거를 자랑하는 일부 '꼰대'들의 말은 여전히 별로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본다. 누구에게나 과거를 잊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모두가 그렇듯이.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는 가까운 미래에 행복해졌을 재스민의 미래를 상상했다. 그렇게라도 그녀의 행복을 믿어보고 싶었다. 크래딧은 어느새 끝이 나고 내 눈앞엔 검은 화면만이 남았다. 넷플릭스는 새로운 영화를 추천했지만,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후유증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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