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통쾌했던 이유
재작년 10월, 극장에서 ‘조커’를 보고 나오는 길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어떻게 저렇게 만들었을까?”
나의 흘린 듯한 말에 함께 영화를 본 엄마의 한 마디.
“그러게. 너무 잔인하고, 저게 뭐니?”
내 입장에선 ‘너무 좋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지만, 함께 본 엄마 입장에서는 너무 잔인하고 별로였나보다. 이후로도 영화관을 빠져나오며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엄마와 나의 관점은 좁혀지지 못했다. 우리의 시선은 조커가 악惡이냐, 선善이냐에서부터 갈렸던 것 같다. 이런 조커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가 왜 조커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부터 시작해야 할 듯 싶다.
아서 플렉은 평범한 노동자였다. 사회적 측면에서 보자면, 평범보다는 조금 더 열악한 위치에 놓여 있는 노동자였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극 초반에 등장하는 길거리 씬은 그의 사회적 위치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서 플렉은 직업적인 위치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도 상당히 고립되어 있는 양상을 띈다. 그는 자신의 스탠딩 개그에 사람들이 한바탕 웃어주거나,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밥을 먹는 상상을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그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삶에서 그의 코미디는 환영받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사랑도 허락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곳에서 더욱 깊숙이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였을까. 아서 플렉이 얼굴의 분장을 가면으로 삼아 조커가 되어버린 것은. 조커는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 또는 자신과 정반대편에 있는 부유층을 상대로 살인을 행한다. 그동안 견디고 참아왔던 울분의 표출이었다. 자신의 코미디를 무시했던 진행자, 자신의 삶을 조롱했던 동료 등등. 조커의 살인은 멈출 듯 멈추지 않을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길거리에서 자신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폭동을 일으킨 조커는 그들 사이에서 마치 영웅이 된 것처럼 환호하고 울부짖는다. 아마 극장의 누군가는 희열을 느꼈을 것이고, 누군가는 표정을 일그러뜨렸을 것이다.
나는 결과적으로 ‘통쾌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불편함을 느꼈다.
영화 속 아서 플렉은 사회적 취약계층으로 볼 수 있다. 사회가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사회적 취약계층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분명 영화 속에서 행해진 ‘살인’은 그의 위치가 최약계층이라고 해서 두둔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모든 약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그러한 행위를 저질러도 된다는, 아주 폭력적이고 비약적인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일례로 최악의 연쇄살인마라 불리는 정남규는 어린시절 가혹한 폭행과 성폭행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저지른 살인의 당위성은 되지 못한다.
살인에는 어떠한 변명도 적용될 수 없다는 게 우리 사회의 흔하고도 당연한 인식이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나는 ‘왜’ 그런 류의-흔히 말하는 사회를 향한 복수심으로부터 살인이 벌어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은 견고하고도 잔인한 사회구조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조커 같은 악마의 출현을 스스로 자초한 사회구조의 문제는 우리 현실에도 존재한다. 부유층과 경제적 최하위계층의 차이는 너무 견고해서 더 이상 변동의 기미가 없고, 이 계층적 차이는 오랜 시간 이어져 왔기 때문에 아무도 뒤집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론 뒤집고자 시도해도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커의 행위는 상징적이다. “부유층과 최하위층을 뒤집어보자”, “나도 그 위로 한 번 올라가보자”라는 식의 강력한 주장. 나는 그러한 발악이 영화라는 작품 내에서 ‘살인’이라는 극단적 행위로 표현되었다고 본다. 2시간 내외 길이의 영화에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강력한 한 방은 우리에게 생각해볼 만한 거리를 던져준다.
영화를 보고 나서, 집에 돌아온 후 다시 엄마와 한바탕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 ― 조커는 악일까, 선일까.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조커는 악이자, 악의 히어로라고. 악과 히어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만, 그 자체가 모순적인 조커에게는 상당히 어울리는 수식어가 아닐까.
이러한 악의 히어로에게 열광하는 시대는 상당히 위험하다. 이전에 한 티비 프로그램에서 탈주범 신창원에게 시민들이 열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식겁한 적이 있었다. 취약계층을 위한다는 의미로 부유층을 처단하거나 그들의 몫을 훔치는 이들에게 열광하는 시대는 아마도 그만큼 위쪽을 향한 분노가 쌓여 있는 시대가 아닐까. 사회는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조커는 악의 히어로를 자처함으로써, 그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조커의 일침에 통쾌해 했던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