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후 깨달음
문제의 유심칩 교환 때문에 결국 애플 A/S센터가 있는 mStore로 가게 되었다. 매장에 들어가 카운터로 갔다. 그리고 날 응대해줄 남자 직원이 “뭘 도와줄까?” 하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유심칩을 교체하고 싶다고 하자 선뜻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직원이 유심을 교체하기 위해 작은 구멍에 핀을 찔러 넣었지만 꿈쩍도 않았다. 그러자 당황하며 힘을 주어 세게 누르자 마침내 유심 트레이가 살짝궁 나왔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는 유심을 교체했고 나는 연신 고맙다고 ‘땡큐’를 내뱉었다. 드디어 유심칩 교환 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매장을 나와서 핸드폰을 들고 인터넷을 열었다. 하지만 인터넷 창에는 연결할 수 없다는 문구만 나왔다. 다른 어플도 되지 않았고 핸드폰이 스웨덴 유심에 적응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 싶어 걷던 길을 다시 걸었다. 그리고 3분 정도 지났을까, 다시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 창을 열었지만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내가 산 유심이 불량인 걸까? 불안한 마음에 다시 매장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전문가가 더 잘 알 테니까.
다시 찾아온 매장은 약간 분주해져 있었다. 앞에 맥북을 구매하는 손님이 있어서 조금 기다려야 했다. 다시 만난 직원은 친절하게도 아까 스웨덴 유심을 떼어내고 버린 종이를 쓰레기통에서 주워 가져왔다. 적혀있는 설명을 읽어보니 통신 회사인 COMVIQ의 어플을 받으라고 되어있어서 우선 어플을 받았다. 어플에서는 내가 산 데이터를 알 수 있는데 확인해보니 지금 나에게는 데이터가 1도 없었다. 0바이트. 직원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나에게 “네가 산 유심은 그냥 오직 유심칩일 뿐이야. 데이터를 따로 구매해야 해.” 라고 했지만 난 분명 240 크로나를 지불하고 10기가바이트를 구매했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직원은 당황하며 아무래도 잘못 받은 거 같다며 어디서 구매했냐고 한다. ‘세븐일레븐’이라고 하자 그는 웃으며 “마침 바로 옆에 세븐일레븐이 있으니 가서 영수증을 보여주면 바꿔줄 거야!” 라고 했다. “하지만 공항의 세븐일레븐인걸?” 내 대답에 그의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변해갔다. “유 캔 트라이..”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동양인이라서 공항의 세븐일레븐 직원이 나에게 사기를 친 건가? 이거 인종차별 당한 거 아냐? 공항까지 가서 바꿔야 하는 거야? 아니면 나 이대로 인터넷 없이 다녀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유심을 다시 구매하기에는 너무 억울한걸.
우선 집으로 가서 영수증을 가지고 근처 세븐일레븐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제 일처럼 도와준 직원에게 ‘땡큐 쏘 머치’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어떻게든 되겠지!
다행히도 여행할 때에는 영수증을 고이 모아두는 습관이 있어서 백팩 앞주머니에서 영수증을 찾을 수 있었다. 접혀있는 영수증을 펴놓고 혹시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정보가 있을지 모르니 네이버에 COMVIQ 유심 검색을 해봤다. 애석하게도 나처럼 이 유심을 샀다가 애를 먹은 사람들이 있었다. 블로그에서 데이터 충전법을 보니 그간 여행하며 사용한 유심 중에 제일 복잡한 시스템이다. 세븐일레븐에서 영수증을 두 장 줬는데 그중 한 장에 코드가 적혀있다. [*110*코드#]을 누르고 전화하면 데이터 충전이 된다. 어플을 확인하니 10기가가 정확하게 충전되었고 인터넷 연결도 잘 되었다. 너무 터무니없고 다행스러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사기당한 줄 알고 여태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주 큰 일을 하나 해낸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헤매지 않게 꼭 알려주고 싶다.
물론 하루 반나절 동안 인터넷 없이 돌아다닌 것이 딱히 불안하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단지 길을 찾을 때 불편했을 뿐. 오히려 카메라 쓸 때만 핸드폰을 찾게 되어서 오롯이 새로운 나라의 모습을 눈에 담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 것 같아 좋았다. 요즘 여행을 하면서 자꾸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진을 위주로 찍다보니 골목골목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해 그 곳만의 소소한 매력을 놓치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더 이상 그런 여행을 하지 말아야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낙엽, 골목에 들어오는 빛, 건물마다 다르게 생긴 문에 달린 손잡이, 알 수 없는 글자로 이루어진 간판들, 주인과 함께 얌전히 횡당보도를 건너는 강아지들, 모두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잠시 머물러 자세히 들여다보며 기억하고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처럼 나를 당황하게 해 준 유심칩은 오히려 나에게 여행에 대한 마음가짐을 초심으로 다잡아주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맨 처음 혼자서 해외여행을 갔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24살 때, 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뜬금없이 혼자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망설임 없이 홍콩행 비행기표를 샀다. 부모님께 여행을 갈 거라고 통보한 뒤 충동적으로 싸구려 디지털카메라를 한 개 구매했다. 그리고 여행을 하는 내내 그 디카로 홍콩의 골목골목을 들여다보고 이곳 저곳을 찍으며 돌아다니던 내가 생각났다. 낯선 나라에 가서 아무렇지 않게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고 새로운 문화에 즐거워하던 나. 순수한 여행자였던 내가,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