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방전
스톡홀름에 오기 전에는 북유럽에도 단풍이 드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 앞에서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단풍을 발견하고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왜 당연히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나 말고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까? 그렇다면 난 이제부터 당당히 아는 척을 할 수 있다. 스웨덴에도 단풍이 물들더라! 고.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흐려도 좋으니 비만 오지 말아라’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비행기를 타기 3일 전에 스톡홀름 날씨를 미리 봤는데 어쩌면 내가 있는 날 내내 비 소식이 있는 것이었다. 날짜를 잡아도 어떻게 이렇게 잡냐며 나 자신을 원망했었다. 모름지기 여행은 날씨가 반 이상인데 한국에서도 별로 반갑지 않은 비 소식이라니. 어쨌거나 이미 여행은 시작되었고 어제는 다행히 날씨가 맑았으니 오늘 흐린 것을 탓하지 말자며 위로했다.
지하철을 타고 슬루센 역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 감라스탄으로 걸어갔다. 스톡홀름의 구시가지인 감라스탄은 13세기에 형성되어 스웨덴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온 곳으로 살아있는 역사와 같다. 그래서인지 스톡홀름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가장 인상 깊은 곳으로 꼽는 곳이기도 하다.
감라스탄에서 유명한 것은 광장, 그리고 골목이다. 여러 건물들 사이사이에 있는 골목들은 모두 다른 색감과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각기 다른 골목을 보는 재미가 있다. 쭉 지나가면서 보이는 골목골목이 모두 달라서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감라스탄의 거리는 굉장히 한산했다. 우선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이 시간에 문을 연 카페로 찾아갔다.
감라스탄의 동쪽 강변에 있는 카페에 갔다. 카페 뒤로 보이는 건물들은 그동안 본 건물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컬러감이나 디자인이 훨씬 과감해 보인다. 게다가 멀리서 보니 13세기부터 유지된 건물 치고는 오래된 건물이라는 느낌이 거의 없었다. 마치 주말에 즐겨보던 ‘서프라이즈’에 가끔 나오는 세트장 같았다.
카페는 이른 오전임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스톡홀름에서는 어느 카페를 가나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느껴졌다. 그만큼 차나 커피를 마시는 문화가 발달했다는 뜻이다. 피카 문화를 가진 나라 다웠다. 이 카페에는 베이커리, 샌드위치 종류가 다양했다. 마침 배가 고파서 무한리필 가능한 원두커피와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주문했는데 계란이 들어간 샌드위치에는 캐비어 소스가 들어간다고 하길래 느낌상 낯선 맛일 것 같아서 무난한 햄치즈로 주문했다. 딱히 별 기대 없이 주문한 크루아상 샌드위치는 부드럽고 맛있었다. 역시나 단순한 조합이 최고의 조합이다. 나는 아침에 눈 뜨면 배가 고파서 뭐라도 먹는 타입인데 이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매일 아침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만큼 맛이 괜찮았다.
창가에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묻어나더니 바깥에는 어느새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집을 나설 때부터 불던 찬바람은 비가 내리자 더욱 거세졌다. 북유럽의 가을 날씨를 얕잡아보고 겨울 옷가지를 챙기지 않았다면 난 엄청난 후회를 했을 것이다. 바깥 날씨가 눈에 훤히 보이니 차마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감라스탄 어느 레스토랑에 점심 식사를 예약해두었는데 아직 예약 시간이 한참이나 남아서 어딜 가볼까 고민하다가 다시 아르켓에 가보기로 했다. 갑자기 몰아친 추위에 뭐라고 사볼까 하고.
결국 아르켓에서 충동구매를 했다. 운동화를 하나 샀는데 영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뭐라도 하나 사고 싶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내게 어울리지 않는 운동화를 사버린 것이다. 의심은 들었으나 긴가민가하며 얼떨결에 구매하고 나왔다. 요즘 들어 소비를 신중히 하는 나는 이 소비가 꽤 이상히 여겨졌지만 당시에는 기분이 좋아져 모른 척했다.
집에 구매한 운동화를 두고 다시 감라스탄으로 돌아와 예약해둔 레스토랑을 찾아갔는데 문이 닫혀있는 것이었다. 분명 1시 예약인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가게 앞을 정리하던 아저씨가 “오늘은 닫는 날이다.”라고 나에게 말했다. 순간 당황한 나는 메일을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내가 예약한 레스토랑을 이 레스토랑으로 착각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예약한 곳은 현재 있는 위치에서 도보로 7분가량 걸리는 곳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감라스탄의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빨리 걷자 비도 더 빨리 맞게 되었다. 젖은 생쥐 꼴이 되어 예약해둔 레스토랑에 도착했더니 빈자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다행히 예약을 해둔 덕에 바로 축축한 코트를 벗어두고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봤는데 빽빽한 영어를 읽기가 힘들었다. 오늘따라 왜 이리 스테이크가 먹고 싶은지 ‘S’ 자만 찾아 읽고 있었다. 주변은 만석이라 굉장히 떠들썩했고 가장 잘 나가는 메뉴가 하필 랍스터 구이여서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다른 추천 메뉴를 찾아봤다. 스웨디시 미트볼이 있었지만 어제 저녁으로 먹어서 물릴 것 같았다. 게다가 음식이 느리게 나오는 편인지 빈 테이블이 여럿이었고 이러다간 나의 배꼽시계 기준인 제시간에 밥을 먹기가 어렵겠다 싶어 결국 다음에 오겠다고 하고 나왔다.
무려 1722년에 문을 연 미슐랭 레스토랑이었다. 어쩌면 내가 메뉴를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와서는 이런 곳에서 식사할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문득 부끄러웠다. 다음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와서 이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제대로 즐겨야겠다고 다짐했다.
당장 아무런 정보도 없이 가게 밖으로 나와 한층 거세진 비를 맞으며 다른 레스토랑을 찾았다. 구글맵으로 근처에 있는 곳을 찾아갔더니 꽤 한산했다. 바 앞의 테이블에 앉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테이크를 주문했더니 속이 시원했다.
잘 구워진 스테이크를 썰어 입 안에 넣고 나서야 비로소 굳어져있던 입가가 부드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배가 부르니 기분도 좋아지고 무기력하던 몸에 온기가 생겼다. 사람은 정말 단순하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서보니 빗줄기가 상당히 굵어졌다. 이 곳의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그냥 맞고 다니길래 나도 여태껏 우산 쓰는 것이 귀찮아 그냥 맞고 다녔지만 빗줄기는 점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비를 맞으며 길을 가다가 어느 기념품 상점에 들어갔다. 비를 피할 겸 기념품 구경을 했지만 딱히 눈길에 드는 것이 없어서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빈티지 상점에 들어갔다.
아주 오래된 테이블웨어, 키친 용품 등 갖가지가 있었다. 수많은 빈티지 잔을 구경했다. 오래된 잔들이지만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구경하는 이는 나 이외에 일본인 부부가 있었다. 감라스탄에 와서 동양인을 처음 봐서 괜히 반가웠다. 다음 기념품 상점에서는 한국인 두 명을 마주쳤다. 감라스탄이 스톡홀름에서 유명한 관광지라는 것이 실감 났다.
결국 다음 기념품 상점에서 3단 우산을 하나 구매했다. 우산을 사러 들어간 것은 아닌데 누군가 우산을 사는 것을 보고 나도 별 수 없이 우산을 샀다. 아무래도 쉽게 그칠 비는 아니었다.
우산을 쓰고 다시 걷다 보니 감라스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스토르토리예트 광장이 나왔다. 귀여우면서 긴 이름은 헷갈리지만 광장의 색감은 잊기 힘들다. 광장에는 노벨박물관, 그리고 아주 오래된 우물이 있다.
스토리토르예트 광장의 아주 오래된 우물은 ‘해골의 샘’이라고 불린다. 실제로 우물을 자세히 보면 약간 기괴한 모습이다.
3국(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연합 시대 말기, 1520년 11월에 스웨덴을 지배하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가 스웨덴 귀족 82명을 학살하는 피바다 사건을 일으킨다. 그 현장이 바로 이 광장, 우물이다. 그 내용을 알고 보면 정말 잔인해서 끔찍하면서도 여태껏 잘 보존된 것이 대단하다. 마치 살아있는 역사의 증거와 같다.
비가 오는 통에 흐려진 날씨에도 광장에 있는 건물들의 색감은 예뻤다. 이 곳에서 피카를 즐기고 싶기도 했지만 비를 맞고 다녀서 추위가 더더욱 느껴졌고 피로감은 두 배속으로 다가왔다. 이러다가 감기에 걸릴 것 같아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나에게 아직 여행할 시간은 많고 오늘은 이만 쉬어가도 괜찮아. 속으로 얘기하며 지하철을 타러 다시 골목을 걸었다. 또 다른 거리가 눈에 보이니 발걸음이 다시 더뎌졌다. 비 오는 감라스탄의 거리는 썩 나쁘지 않았다. 못 둘러본 곳은 내일 다시 와서 둘러보기로 하고 지하철을 탔다. 집에 가기 전 바로 옆의 마트에 들러 도넛과 초콜릿 칩을 샀다. 뜨거운 물로 씻고 나오니 몸이 노곤해졌다. 노트북으로 즐겨보는 예능을 틀고 누워서 도넛을 한 입 먹었는데, 천 원짜리 도넛 치고는 퀄리티가 좋았다. 한국 마트에서 이런 도넛을 판다면 매일 사 먹을 텐데. 좀 쉬다가 창가를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파란 하늘이 보랏빛이 되고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비 오는 날에는 역시 따끈한 국물이 생각난다. 한국에서 남자 친구가 손수 챙겨준 컵라면을 꺼냈다. 비 오는 날 스웨덴에서 라면을 먹는 일은 내게 또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스웨덴에서는 어떤 평범한 일 조차 특별한 일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 11시가 다 되어서 씻고 누워 짧은 취미생활 후 잠에 들기 바빴는데, 이 곳에서는 일찍 집에 와서 씻고 간식을 먹으며 예능 프로를 보고 저녁을 먹어도 8시밖에 안되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참 바쁘게 사는구나. 현대사회 직장인들도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도통 내 시간을 가지기가 힘든 일이 제일 슬프다.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티비를 보는 것도, 책 몇 장 읽기도 눈치가 보인다.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잠에 들어야 한다고 재촉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나 스스로의 눈치를 보며 정해진 시간 안에 잠들도록 노력한다. 일주일에 하루뿐인 휴일에는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고 놀기 바빠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린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이따금씩 “나 잘 살고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이 머릿속을 스치지만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본다면 나도 처음 사는 것 치고는 나름 잘 살고 있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