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단 맛
중앙 역을 지나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오후 3시도 안 되었는데 흐린 날씨 탓인지 해가 일찍 질 것만 같아 보였다. 쌀쌀한 날씨에 몸이 움츠러들고 따뜻한 커피 생각이 났다. 중앙역부터 걸어가기로 한 곳은 스톡홀름 시청사다. 처음 가보는 곳으로 가는 길은 낯설기보다 새롭고 반가웠다. 커다란 강줄기를 따라 걸으며 강 건너 내가 묵고 있는 쇠데르말름 쪽의 경치를 감상했다. 땅이 넓어서인지 평일이라 그런지 길에 사람이 참 없다. 어딜 가든 북적이는 서울과는 참 다르구나 싶었다.
스톡홀름 시청사에 다다르기 전에 발견한 작은 노상 카페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따뜻한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카푸치노는 글라스 잔에 나왔다. 커피는 맛이 없었다. 하지만 이 곳의 분위기가 좋으니 기분도 좋았다. 강 앞의 야외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는 기분은 언제나 좋다. 마치 비교할 수 없는 여유로움이 생긴 기분이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풍족한 시간을 보내고 시청사로 갔다. ‘남의 나라 시청은 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스톡홀름 시청은 조금 특별하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시청사 곳곳을 누비며 역사를 들을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투어를 목적으로 이 곳에 왔다.
스톡홀름 시청사에 도착해 아치형의 입구를 지나 들어오면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 기둥 사이로 저 멀리 강 건너 보이는 쇠데르말름의 풍경까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름다운 건축에 감탄하며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다가 목적을 깨닫고 건물 입구로 다가갔다. 입구에는 덩치가 커다란 남자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시청사 투어는 오늘 끝났어.”
지금은 3시인데, 벌써 끝이 났단다.
허얼. 어쩌지. 어쩔 수 없지.
시간도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온 내가 바보지.
여행을 하면 원래 변수가 많아서 항상 꼼꼼한 계획 하에 움직였던 내가 이렇게 무계획 여행의 쓴 맛도 본다. 별 수 없는 상황이니 빠른 포기를 하고 그냥 주변이나 둘러보고 가자며 강가로 나왔다. 위로가 되는 것은 나 말고도 모르고 온 사람들이 꽤 된다는 것. 그리고 이 곳엔 그동안 보지 못했던 한국인들이 꽤 있다!
강변에 놓인 벤치에 앉아보니 흐리고 어둑한 날씨여서 참 아쉬운 날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스톡홀름의 맑은 날과 흐린 날 모두를 본 것이 행운이 아닐까. 계속 흐리기만 하거나 맑기만 한 것은 어쨌든 한 가지만 겪는 것이기에 이 드넓은 풍경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좋은 기회였다.
해가 저물기 전에 서둘러 버스를 타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처음 가보는 낯선 동네. 또 다른 분위기가 나를 흥미롭게 했다. 지도를 잘못 보고 반대 방향으로 걷다가 다시 원래 방향으로 걸었다. 구글맵이 없으면 어쩌나 싶다. 목적지인 카페로 갔더니 오후 4시에 닫는다고 한다. 도착한 시간은 3시 50분경. 이렇게 일찍 닫는다니 굳이 찾아온 길이 애석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참 부럽기도 하다. 다행히 근처에 구글맵 초록 깃발로 저장해둔 곳이 있어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 길가에 있는 한 카페. 쌀쌀한 날씨임에도 테라스에 사람들이 많이 앉아있다. 나도 따뜻한 커피와 디저트를 주문하고 테라스로 나왔다. 신기하게도 머리맡에 온풍기가 하나씩 달려있다. 그만큼 겨울에도 테라스에 앉는 것을 선호하는 문화인 듯하다.
서로 반대인 씁쓸한 블랙커피와 달달한 쇼콜라는 환상의 궁합이다. 꾸덕한 초콜릿이 입 안에 달라붙어 기분을 좋게 해 준다. 한창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는데 내가 앉은 테이블로 누군가 합석을 했다.
자그마하고 날쌘 생명체가 쪼르륵 다가왔다.
이 구역의 깡패처럼 스웨덴의 참새는 겁도 없다. 손님들이 다 먹고 일어난 테이블에 남은 디저트를 쪼아 먹으러 이리저리 빠르게 옮겨 다니다가 내 테이블까지 왔다. 미안하지만 난 이제 막 한 입 먹기 시작했다고!
손을 휙 휘두르니 옆 테이블로 날아가버린다. 하지만 금세 또다시 내 테이블로 날아왔다. 그만큼 이 초콜릿 향이 진하고 달콤했다. 아까 맛 본 무계획 여행의 쓴맛은 금방 잊힐 정도였다. 쓴 맛이 있으면 단 맛도 있다.
카페에 앉아 느긋하고 한가로운 오후 시간을 보내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이 곳에서 낯선 이방인이지만 스웨덴 사람들은 나를 전혀 낯설게 대하지 않는다. 옆에 앉은 젊은 부부와 아기는 나를 보고 방긋 웃어준다. 아기는 나를 계속 본다. 내가 눈웃음을 치며 손을 흔들자 아기가 웃는다. 아기의 눈에는 다 똑같은 사람이겠지. 아기의 눈높이처럼 편견 없는 스톡홀름이 좋다. 그들은 생김새가 다른 내가 어디에서 왔던 신경 쓰지 않는다. 나도 겉모습으로 남을 판단하고 신경 쓰지 말아야겠다고 상기시켰다. 당연하지만 어려운 것. 아직도 배울 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