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헬싱키
전날 밤 짐을 싸는데 한참 고민하느라 잠을 설쳤다. 9월 말, 선선한 가을인 우리나라의 날씨와 달리 북유럽은 약 10도 가량이 더 낮은 기온이다. 겨울 옷가지를 넣으려니 캐리어 사이즈를 두고 큰 고민을 하다가 결국 24인치와 배낭으로 결정했다. 캐리어는 금새 옷으로 가득 찼다. 터키 여행 때는 열흘 동안 어떻게 배낭 하나로 버텼나 모르겠다.
인천공항에서 생긴 일
이른 아침, 고맙게도 남자 친구의 배웅으로 편히 공항에 도착했다. 어제 메일함을 보다가 핀에어에서 모바일로 웹 체크인을 하라는 메일을 발견하고 미리 웹 체크인을 해놓았다. 체크인 카운터는 아니나 다를까 줄이 길었고 웹 체크인 라인은 텅 비어있었다. 여행에서는 미리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나중에 편해진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경유 일정이라서 두 장의 항공권을 받고 짐을 부쳤다.
큰 일을 해결하니 배고픔이 몰려와 파리바게트에서 두유와 커피, 샌드위치를 샀다. 벤치에 앉아 남자 친구와 함께 간단히 요기를 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다 먹고 일어나 다 마신 두유 유리병을 눈 앞에 보이는 쓰레기통에 던졌다. 유리병이 쓰레기통 바닥에 닿자마자 ‘푝!’ 하고 뚜껑이 열리더니 튕겨 올랐다. 순식간에 뚜껑은 지나가던 아저씨의 이마를 정확히 가격했다. 이마를 손으로 감싸고 쳐다보는 아저씨에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아저씨도 웃으며 지나갔다. 하필 이런 시트콤 같은 우연이. 고의는 아니었지만 지나가다 병뚜껑에 맞은 아저씨에게 미안하면서도 상황이 너무 웃겼다. 별 일이 다 있다며 웃으면서 화장실로 들어가 볼일을 보고 손을 씻었다. 거울을 보고 나오려는데 갑자기 어떤 아주머니가 커다란 전신 거울로 돌진을 하더니 이마를 박았다. 설마 저 거울을 화장실 입구로 착각한 건가? 또다시 펼쳐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오늘따라 남의 이마의 노고를 두 번이나 목격하네.
북유럽은 해가 일찍 지고 밤이 길다는 말에 노트북을 챙겼는데 짐 검사할 때 꺼내야 해서 아주 귀찮았다. 기내 수화물 검사를 마치고 면세점으로 나와 탑승 시간까지 시간이 꽤 남아서 마티나 라운지에 갔다. 간단히 과일과 음료수를 먹으며 스톡홀름 알란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 방법을 검색했다. 알란다 공항에서 스톡홀름 시내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교통비가 워낙 비싸서 그나마 가성비 좋은 공항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마침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서 메시지가 왔는데, 공항에서 숙소까지 오는 방법을 알려주는 메시지였다. 마침 그녀도 나에게 공항버스를 추천하며 친절하게도 예매 사이트 링크까지 보내주었다. 그 링크를 통해서 버스 티켓을 미리 예매하고 나니 슬슬 탑승구로 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목적지가 헬싱키이거나, 헬싱키를 거쳐 유럽 어딘가로 가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괜스레 혼자인 게 쓸쓸해지면서도 한국인들이 유럽을 참 많이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여행이 특권층이나 소수만이 누리는 특별한 일이 아닌 누구에게나 일상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들떴다. 나 또한 고소득자가 아니며 평범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저 여행을 일상처럼 삼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장거리 비행은 터키 여행 이후로 두 번째이다. 터키를 갈 때 무려 직항 10시간 가량을 비행해서 기내식 세끼를 먹고 영화를 세 편 봤던 기억이 난다. 나름 할만했던 기억이다. 이번에는 핀란드의 국적기인 핀에어를 타고 약 9시간 30분을 날아가 헬싱키를 경유해서 스톡홀름까지 가는 머나먼 일정이다. 핀에어는 처음 타보는데 엄청 깔끔하고 차가운 인상의 항공사이다. 핀에어 승무원들 중에는 한국인도 몇 있었는데 모두들 친절했다. 우리나라 항공사와 달리 핀에어는 승무원들을 외적으로 차별하지 않는 듯했다. [승무원=젊고 날씬하고 예쁘다]라는 공식은 핀에어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하거나 뭔가 다르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였다.
내 옆자리에는 장노년 부부가 앉으셨는데 할머니께서 먼저 나에게 말을 건네셨다. 어디로 여행을 가는지, 혼자 가는 것인지 이것저것 물으셨다. 나는 마침 혼자라서 할머니와의 대화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낯선 사람과의 대화가 반가웠다. 할머니는 남편분이 베를린에서 학회가 있어 겸사겸사 따라가 여행할 계획이라고 하셨다. 계속해서 대화를 하다보니 여행을 굉장히 많이 다니신 것 같았다. 북유럽 중에서는 노르웨이가 제일 좋았고, 유럽은 통틀어서 포르투갈이 제일 좋다며 다음에 꼭 가보라고 추천을 해주셨다. 할머니의 세대에 이렇게 여행을 많이 다니신 분은 처음 만나봐서 참 신기하고 대단해 보였다. 나도 시간과 돈만 충분하다면 유럽 일주를 했을 텐데,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작년에 처음 해외여행을 갔다. 그리고 올해 두 번째 여행을 했다. 해외여행에 별 관심이 없던 우리 엄마도 한 번 가보니 좋아서 또 가고 싶다고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엄마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함께 여행을 많이 다녀야지.
점심시간이 다 되자 금방 기내식이 나왔다. 하늘에서 김치를 만나니 참 반가웠다. 핀에어 기내식이 맛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식사 후 한참 자다가 눈을 떴는데 비행이 아직도 5시간이나 남아있었다. 엉덩이가 저릿해지고 무릎이 뻐근해졌다.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아 멍하니 있다가 사전 구매해둔 기내 와이파이가 생각나 한국인 승무원에게 사용 방법을 물어보았다. 3시간 동안 이 무료함을 달래줄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인터넷 속도는 정말 느렸지만 가족, 남자 친구와 연락을 했다. 웹툰도 보고 SNS를 하니 휴대폰 없이 어떻게 사나 싶다. 현대인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끔뻑끔뻑 졸았다가 눈을 뜨니 어느새 착륙을 하고 헬싱키 반타 공항에 도착했다. 기장의 성격이 급했는지 한 시간이나 빨리 도착했다. 아무런 정보도 검색해보지 않고 내려서 보니 입국심사장이 아닌 면세장이었다. 멀뚱하게 서있다가 인천공항에서 받은 항공권에 게이트가 적혀있지 않아서 어리둥절했다. 공항 와이파이를 연결해 핀에어 어플에서 보니 게이트 20번이라고 나와있길래 이정표를 보고 따라가니 환승하거나 입국하는 사람들을 심사하는 입국심사대가 있었다.
나라마다 공항의 분위기가 다른데 헬싱키의 첫인상은 비교적 딱딱하지 않고 자유로워 보였다. 입국 심사 줄을 관리하는 직원은 껌을 쫙쫙 씹으며 짝다리를 짚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줄을 관리하다가 사라져서 사람들이 알아서 심사대 빈 곳으로 갔다. 나도 따라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옆에 한국인 중장년 부부가 입국 심사를 받고 있었다. 들으려던 건 아닌데 순간 커다란 목소리로 ‘여보세요?’라는 한국어가 들려서 쳐다보게 되었다. 그들은 영어를 전혀 못하는지 입국 심사 직원이 영어로 뭘 물어보자 자신의 딸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다짜고짜 전화기를 내민 것이다. 직원이 당황하더니 별 수 없이 딸과 통화를 하고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부부가 지나가고 나서는 날 심사하는 직원과 함께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나 또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김없이 나에게도 질문이 던져졌다. “어느 나라에 가니? 여행은 며칠 동안 하니?” 그 질문에 대답하고 여권에 도장이 찍히자 잠잠하던 마음 한구석이 설레기 시작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와 20번 게이트로 향했다. 면세장에는 핀란드를 대표하는 브랜드인 무민과 마리메꼬 매장이 있었다. 귀여운 두 브랜드에 눈길이 가서 발걸음이 자꾸 더뎌졌다. 탑승까지는 아직 두 시간 정도나 남아서 근처 카페로 갔다. 마침 배도 고픈 찰나여서 샌드위치를 먹을까 하다가 세트 메뉴가 있길래 주문했다. 아주 차갑다는 북유럽 물가를 처음 겪게 되는 일이었다. 샌드위치와 시나몬 롤, 그리고 카푸치노. 이렇게 세 가지 세트가 한화로 약 19,000원. 사실 우리나라의 카페 물가도 세계 어디에서 뒤지지 않기 때문에 이 정도론 별로 놀랍지 않았다.
활주로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양심적으로 나만 노는 것이 좀 찔려서 여행하는 동안 짬짬이 새로운 메뉴판을 만들기로 했다. 일을 하다 보니 가게가 걱정이 되어 영상통화를 했다. 일하고 있는 동료들을 보니 마음이 왠지 울렁거렸다. 괜히 왔나..? 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다. 그 마음도 잠시, 사둔 샌드위치를 한 입 먹자마자 다시 씹기도 싫을 만큼 맛이 없어서 황당함이 몰려왔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맛의 빵. 빵 자체가 퍽퍽하고 이상한 향이 났다. ‘그래도 시나몬롤은 괜찮겠지.’ 전혀 안 괜찮았다. 빵이 딱딱하고 시나몬 향이 과하게 났다. 빵을 포기하고 카푸치노를 마셨다. 커피가 들어가니 배고픔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샌드위치에 다시 손을 뻗어봤지만 입으로 갖다 대기까지 오래 걸렸다. 마지못해 한 입 더 먹어보았다. 정말 못 먹을 맛이다. 슬프게도 헬싱키에서의 첫 빵은 내 인생에서 최악의 빵이 될 것 같다.
스톡홀름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탑승구로 갔다. 순간 낯선 공기가 느껴졌다. 스톡홀름으로 가는 이 여정에는 동양인이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 홀로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는 사람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사람들, 가만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모두 생김새만 다른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길쭉한 북유럽인들 사이에 껴서 비행기에 탑승하고 북유럽 할아버지 옆 자리에 앉았다. 그에게 익숙지 않은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는 동양인을 처음 보셨는지 나를 자꾸만 흘끗 쳐다보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창 밖을 보니 어느새 수많은 섬들과 작은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네모를 이루고 있는 집들이 마구마구 보였다. 수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 스웨덴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