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고수의 몰락
공항에서 숙소로
스톡홀름 알란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그동안의 여행 경력이 무색할 정도로 헤맸다. 여행사 직원에게 유심칩을 어디서 사야 하는지 물었더니 세븐일레븐으로 가라고 했다. 터미널이 4개나 있는 공항에서 단 하나뿐인 세븐일레븐을 찾기 위해 꽤나 애를 먹었다. 터미널 2에서 나온 나는 물어물어 터미널 5에 세븐일레븐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그곳으로 갔다. 공항이 얼마나 넓은지 꽤 오래 걸어가서야 겨우 세븐일레븐에 도착해 유심칩 일주일 짜리를 사고 싶다고 얘기하니 3기가와 10기가 중 몇 기가가 필요하냐고 한다. 부족한 것보다는 남는 것이 나을 것 같아 10기가로 구매한 뒤 다음날 여기서 사용 방법을 묻지 않고 나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할 일을 전혀 모른 채 버스를 타러 갔다. 세븐일레븐에서 밖으로 나오면 바로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여기에서 또 엄청난 내적 갈등이 생긴다. 대체 내가 타야 할 버스의 정류장은 어디인가. 정류장이 무지하게 많다. 쓰여있는 건 분명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스웨덴어는 눈을 어지럽게 했다.
내가 산 버스 티켓의 도착지를 확인하고 바로 앞에 있는 정류장에서 긴가민가하며 버스를 기다렸다. 전광판에서 버스가 6분 후 도착이라고 나와서 안심했다. 정류장 벤치에 앉아있으니 입에서 김이 나왔다. 공항에서 배낭을 메고 무거운 캐리어를 끌으며 헤매느라 더웠는데, 바깥에 조금 앉아있었더니 금세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좀 전만 해도 ‘생각보다 춥진 않네, 캐시미어 재킷을 괜히 챙겼다.’며 콧방귀를 끼던 나는 어느새 배낭에 있던 가죽재킷을 꺼내 입고 캐시미어 머플러를 둘러맸다. 몇 분이 지나자 손이 시렸다. 그리고 바로 반성했다. '내가 경솔한 생각을 했구나.'
잠시 후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도착했고 짐칸의 문이 열리자 캐리어를 넣고 올라탔다. 보통은 스톡홀름 중앙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때문에 나의 목적지인 쇠데르말름을 지나는 버스는 텅텅 비어있었다. 약 50분 정도를 가야 해서 배낭을 편히 옆자리에 내려놓고 창밖을 보니 하늘이 연한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곧이어 연보랏빛으로 바뀌어가는 하늘, 기다란 나무들, 낯선 글자들. 평소에 보던 익숙한 풍경이 아닌 다른 것들을 보는 일은 참 재미있다. 어떤 건 비슷하고 어떤 것은 정말 다르다. 바깥을 관찰하다 보니 도로가 텅텅 비어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한국이었으면 퇴근 시간 겹쳐서 꽉 막힌 도로였을 텐데.
목적지에 내려서 구글맵으로 방향을 살피고 내가 3일간 묵을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보이는 건물들은 다 큼지막하고 비슷한 구조였다. 하지만 조금씩 색깔이 다르고 현관문이 다르게 생겼다. 길을 걸으며 처음에 적응이 힘들었던 점은 인도와 차도 사이에 자전거 도로가 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주변을 감상하며 멍 때리고 걷다 보면 자전거 도로로 걷게 되어서 달리는 자전거를 보고서야 인도로 급하게 올라섰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지도에 표시해둔 곳까지 다 왔다. 분명 다 왔는데, 내 눈 앞에 있는 이 커다란 건물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이 건물은 그냥 상가처럼 보였고 이게 아파트인지 뭔지 알 길이 없었다. 너무나도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호스트에게 온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메시지에서 33이라는 숫자가 보여 건물 코너 쪽의 문을 보니 33이라고 크게 써져 있었다. 그제야 감이 와서 문에 있는 장치에서 호스트의 룸으로 호출벨을 눌렀다. 최신식이 아니라서 좀 어려웠지만 맞게 되었는지 목소리가 들렸고 내 이름을 말하자 문이 열렸다. 드디어 들어왔다는 안도감도 잠시, 메시지에서 호스트는 5층으로 올라오라고 했는데 이 곳에서는 엘리베이터가 보이지 않았다. 내 눈 앞에는 그저 문 두 개와 계단 이렇게 끝인데. 두 개의 문 중에 하나가 엘리베이터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쩔 줄 몰라 어벙벙하고 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이 곳에 사는 주민이 들어와 바로 내 앞에 있는 문을 열었다. 맙소사. 셀프로 문을 열어서 타는 엘리베이터라니. 버튼 같지도 않은 버튼이라니. 나중에서야 위를 보니 작은 숫자가 층수를 알려주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우선 함께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내릴 때도 찰칵하고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나면 문을 손으로 밀어 열고 내려야 한다. 상상 이상으로 아날로그적이어서 웃음이 났다.
5층에 내리자마자 또 멘붕이 왔다. 메시지에는 왼쪽으로 나와서 적혀있는 이름의 집이라고 하는데 5층에 있는 두 집 중에 왼쪽 집에 적힌 이름이 알려준 이름과 달랐다. 두리번거리다가 오른쪽에 문이 하나 있길래 나가보니 복도가 있었고 호스트가 마중 나와 있었다.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잖아.' 이를 악물고 반갑게 인사했다.
거의 13시간 만에 도착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집에 들어서 내 방으로 가려는데 호스트가 다급히 신발을 벗어달라고 한다. 외국이라고 집에서 다 신발을 신지는 않는구나. 신발을 벗고 차가운 바닥을 밟으니 왜 카펫을 까는지 이해가 되었다. 한국처럼 온돌이나 보일러가 없으니 카펫으로 차가운 바닥을 보완하는구나.
내가 예약한 곳은 투룸 아파트인데 방 한 칸을 사용하며 거실과 부엌,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한다. 운 좋게도 3박 중에 2박은 다른 방에 예약이 없어 나 혼자 집을 사용할 수 있고 마지막 날만 호스트의 아버지가 오신다고 하였다. 집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호스트는 나갔고 나도 짐을 대충 정리하고 배가 고파서 집 바로 옆에 있는 이카(ICA)라는 현지 마트로 갔다.
이카는 우리나라와 비교하자면 이마트 에브리데이 정도 규모의 마트이다. 나라별 주식이 다르기 때문에 마트에서도 취급하는 종류가 조금씩 다를 것 같아 흥미로웠다. 스웨덴의 현지 마트에서는 아시아권의 주식인 쌀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대신 빵의 종류가 굉장히 다양하고 손쉽게 낱개로 구매가 가능하다. 생수보다 탄산수의 종류가 훨씬 많기 때문에 물을 살 때는 잘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케첩이나 머스터드, 토마토, 크림 등의 소스 종류가 굉장히 다양하다. 냉동 피자의 종류 또한 다양하길래 뭘 살지 한참 고민하다가 하와이안 맛을 골랐다. 매일 챙겨 먹는 유산균을 대신할 마시는 요구르트, 그리고 지나가다 발견한 치즈맛 과자를 손에 쥐고 계산대로 갔다. 마트에서 계산할 때는 외국인이라 아이디카드를 요구하는데 여권을 보여주면 된다. 신용카드의 이름을 확인하는 듯했다.
스톡홀름은 노캐쉬인 곳이 많아서 신용카드 한 장으로 여행이 가능하다. 실생활에서는 아날로그적인 부분이 많은데 노캐쉬를 지향하다니 뭔가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오히려 현금을 내면 더 손해인 부분이 많으니 [거스름 돈을 안 준다던가 카드보다 비싸게 받음] 스톡홀름 여행을 할 예정이라면 참고할 것!
집으로 돌아와 보니 마침 호스트가 집에 있어서 전자레인지 사용법과 물 끓이는 법을 배웠다. 한국에서 남자 친구가 챙겨준 컵라면을 피자와 먹기로 했다. 이상한 조합 같지만 추운 날씨에 도저히 국물 생각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데운 냉동 피자와 컵라면을 두고 보니 스톡홀름에서의 첫 끼니로써 영 볼품없어 보였다. 하지만 극심한 피로에 무엇이로든 어서 고픈 배를 채우는 일이 급선무였다.
식사 후 호스트에게 뾰족한 핀이 있으면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호스트는 선뜻 찾아봐주었고 잠시 후 나에게 핀을 가져다주었다. 휴대폰 케이스를 벗기고 유심칩 홀더를 빼기 위해 작은 구멍에 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분명 이 작은 구멍을 핀으로 누르면 홀더가 살짝 나오는데, 도저히 나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최대한 힘을 줘서 눌러보았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절대 나오지 않았다. 혹시 고장이 났나 싶은 마음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이대로 남은 일주일을 인터넷 없이 돌아다녀야 하나? 하라면 하겠지만은 너무나도 불편하고 힘들 것이다. 우선 스톡홀름에 애플 A/S센터가 있는지부터 찾아보았다. 다행히도 한 군데 있었다. 그래, 내일 해결하자. 더 이상 걱정하기에는 오늘이 너무 고되었다.
화장실 바닥에는 두 개의 카펫이 깔려있었다. 하나는 욕조 앞, 다른 하나는 세면대 아래. 한국과 다르게 유럽 화장실은 건식이라 바닥에 물기가 없다. 바닥에 하수구가 없어서 물기가 생기면 밀대 걸레로 닦아서 물기를 제거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샤워부스가 있거나 욕조에 샤워 커튼이 있다. 이 집도 마찬가지로 욕조에 샤워 커튼이 있는 형식이다.
씻고 나서 침대에 몸을 뉘이니 천국이 따로 없다. 발이 시려서 양말을 신을까 하다가 핀에어에서 준 어매니티 중에 수면양말이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게 수면양말은 여행 내내 밤마다 나에게 완전 유용한 아이템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