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강아지의 마지막 사이클이 시작되었다
나의 강아지가 노견의 생에 접어들었다.
언젠가 오겠지 했었다. 나의 강아지 한까미에게도 노견의 시절이 올 것을. 그때가 되면 나는 최대한 담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곤 차근히 하나씩 노견의 생애를 잘 꾸려줘야지. 조급해지고 줄곧 슬퍼지는 내 마음을 나의 강아지에겐 꼭꼭 숨기고 꼭 즐겁게 우리 시간을 보내보자고, 너의 노견의 시절을 언니가 응원한다고 그렇게 웃으면서 유쾌한 시간으로 채워 보내야지 하는 다짐을 많이도 했었다.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담대하지 못했다. 까미가 아픈 것 같다는 아빠의 문자에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았고, 아픈 까미를 보는 것도 무서워 곧장 데리러 가지 않고 병원을 예약하곤 다음날 연차를 내어 까미와 병원에 다녀왔다.
까미는 그날 좋은 소식 그리고 나쁜 소식 두 가지를 가져왔다.
나쁜 소식으로는, 예감했듯 까미의 생이 쌓여올수록 손상됐을 이빨의 문제였고, 좋은 소식으로는 혈액(청) 검사에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건강했다는 것이다.
관리를 잘해주었다면 이렇게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나의 무지함으로 까미를 고생시킨 것 같았다. 다른 것엔 그토록 대범한 내가 가장 약해지고 겁쟁이가 되는 것은 늘 까미 앞이었다. 이빨을 관리하려면 작정하고 양치를 잘 시켰어야 했고, 스케일링을 미루지 않고 수면마취에 들어가기 전 하는 모든 검사의 과정들과 마취를 무서워하면 안 되었다.
까미가 어릴 적. 중성화 수술을 했을 때에도 나는 너무 겁이 났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손목에 마취 주사 바늘을 꽂는 것만 보아도 심장이 덜컹했고, 수술이 끝난 후 생전 처음 보던 까미의 초점 없는 눈과 축 쳐진 몸을 보고 잠시 까미의 죽음의 모습 형태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 후로는 나의 무서움 때문에 까미를 병원에 데려가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누군가를 책임지려면 생각보다 강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까미를 통해 알게 되었다.
1. 강아지는 생의 주기가 인간보다 확연히 짧다. 그것을 인정하자.
2. 누구나 죽는다. 죽음이 나쁠까? 사람이나, 견생이나 각자 인생의 몫을 잘 살고 때에 맞게 간다면 그것은 나쁜 일이 될 수 없다.
3. 까미에게 더 잘해줄 수 있는 시간은 많다.
4. 노인이 되면, 노견이 되면 누구나 아프다. 아프지 않은 게 축복인 것이지 당연한 건 아니다.
5. 슬퍼할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사랑한다고 말해주자. 누군가 나를 보고 슬퍼만 한다면 그 마음이 아무리 사랑이라 하여도 달갑지 않을 것 같다.
위 다섯 가지의 다짐을 시작으로 나는 까미와의 제2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만히 삶에 대해, 이치에 대해 많은 깊은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간 인생을 그냥 바쁘단 핑계로 대충 느끼며, 할 수 있는 일들만 겨우 하며 살았었는데 이제는 정말 전투적으로 사색의 삶을 살게 되었다. 요즘 나의 가장 큰 생각의 고리들은 믿음, 사랑, 부박함, 경솔함 이 것들이다.
믿음은 무엇일까, 어디까지를 믿음이라 할 수 있는지. 믿음으로서 얻는 것과 잃는 것. 그 차이를 앎이 진정한 믿음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고 있으며, 사랑은 어디까지 초월할 수 있을까. 사랑을 하면 할수록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외로우며 나의 결여를 인지하게 되는 건 왜일까... 과연 일반적인 감정일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며, 당당함과 부박함을 제대로 알고 늘 나를 다잡으며 경솔함을 최소화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까지. 그리고 또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는 결정들에 대한 뒷모습이 누추하지 않길 바라면서 무수한 감정들을 만나 깊은 생각을 많이 하며 지낸다. 복잡하긴 하지만 그래서 예민해서 최 측근에게 더 섭섭함, 고마움, 사랑, 미움 등을 더 표하게 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냥 살아내던 지난날과 비교해 무언가 꽉 찬 지금의 내가 더 나다움에 가깝다.
이 감정들은 전부 다 나의 반려견 까미 덕이다.
인생의 사이클을 전부 돌아보지 못한 언니가, 너의 인생 사이클의 마지막 여정을 가장 옆에서 최선을 다해 응원해 줄게! 언니 준비 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