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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감독 Jan 13. 2019

나의 강아지를 시한부로 생각한 죄




누군가의 전부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가져온다.


강아지가 있는 친구의 집이나 친척집에 놀러 갔다 오면 늘 제일 먼저 하던 일.


1. 문 앞에서 양말, 옷 다 벗기

2. 바로 씻기

3. 물 마시기 (강아지가 있는 집에서는 무언가를 잘 먹질 못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유난이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 나는 인간 외에 어떤 대상과 교류를 해본다거나 사랑한다거나 마음 써보는 일은 해보지 못했다. 그게 다다.


그랬던 내가 강아지를 직접 키우게 된 대에는 여러 사연이 있다. 큰 공원이 있는 동네로 이사를 온 후 산책길에 강아지들을 많이 접하게 되면서 '강아지'에 대한 인식을 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때 나는 부모님에게서 심리적 독립을 시작했다. 대학교를 졸업하여 직장 고민에 소란했었고, 무언가 나를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시기였다. 그러면서 급격히 외로워졌었다. 아무도 내게 "넌 혼자야!" "넌 이제 절대 누구에게 기대선 안돼"라고 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를 외로이 몰아갔다.


그러면서 나는 조건 없이 내가 사랑해 줄 대상을 찾았다. 그게 지금 내 옆에 있는 한까미(슈나우저. 3살. 여)가 되었다.


2018년 4월 까미의 3번째 봄



좌충우돌 강아지에 대해 알아가며 한 생명체와 삶을 공유하고 시간을 나눠 쓰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세상에 이렇게나 예뻐도 되는 거니?를 밥 먹듯 뱉어내며 나의 강아지를 사랑하는 일에 몰두했다. 내 인생은 원래도 충만했지만, 강아지를 키우면서 성숙해지는 나의 모습에도 형용 못할 깊은 감정을 느꼈다. 나는 애정을 받는 것 외에 주는 것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사람이구나, 싶어 내가 신기할 정도!


매년 강아지의 생일날에는 친한 언니의 애견 스튜디오에서 기념 촬영을 하였고, 예쁜 풍경의 공원은 다 데리고 갔다. 분기별 바다를 보여주기도 하였고, 강아지 요리책을 보며 유기농 간식을 만드는 유난도 선보였다. 그렇게 행복했지만 행복한 만큼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이 있다. 바로 내 앞에 있는 이 강아지는 나보다 가진 시간이 현. 저. 히 적다 라는 것!


모르고 시작한 일도 아니었다. 그치만 내가 나의 강아지 까미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내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조급해졌다고 크게 나의 행동이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만큼 우울해, 왜 그럴까



까미가 우리 집에서 같이 산지 일 년이 훌쩍 지난날이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머리맡에 까미가 누워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다. 나도 아무 말 없이 까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가 깨면 기다렸다는 듯 핥고, 장난감을 물어오며 장난을 치던 까미가 그날은 이상하게도 계속해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던 이상한 마음이었다. 눈으로 말한다는 것, 꼭 까미가 내게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긴 긴 시간 서로를 따스히 쳐다보았다. 그날 진정한 '교류'를 한 것 같아 마음이 찡했다.


나는 나름 노력했다. 매일 같이 산책을 나갔고, 강아지 요리책을 사서 몸에 좋은 건강식과 간식도 직접 만들어 주며 바쁜 출근 준비에도 늘 아침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만큼 까미도 우리에게 잘했다. 짖지 않고 몸 건강히 열몇 개의 장난감 이름을 외우며 신나게 뛰어놀고, 탄탄한 몸매를 소유한 강아지의 모습으로 우리 옆에 있었고 또 지금도 있다.


사랑하는 마음이 증폭될수록 나는 자주 불안해졌고 슬퍼졌다. 강아지와 이별하는 주변인들을 볼 때마다 나는 자주 주저앉았다. 감수성이 특히나 예민한 탓에 상상만으로도 아플 수 있는 나는 까미와의 먼 훗날의 이별이 말 그대로 공포였다. 까미와 산책을 나가면 '까미가 죽고 나면 산책을 더 많이 시켜주지 못해 후회가 되면 어쩌지?', 까미의 침구류를 보며 '여기에 누워있던 까미를 이제 못 만지면 어쩌지?', 까미가 잘못해서 혼내고 뒤돌면 '이런 까미라도 없으면 어쩌지?' 등 쓸데없는 먼 훗날의 시간에 현재를 빼앗겨 스스로를 더 고통스럽게 했다. 


까미는 건강했지만 종종 예민한 장으로 나를 힘들게 했다. 먹는 패턴이 조금만 틀어지면 곧 잘 토를 했다. 까미가 숨을 못 쉬며 토해낼 때마다 오히려 나는 내 숨이 멎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지인과 통화를 하며 까미의 토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까미 증상이 어떻다고?"


"노란 토를 하고, 사료도 안 먹어... 종종 그렇기는 해"


"우리 애기도 (이미 무지개다리 건넌) 파보 장염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그런 경우에는 정말 심각해서 한눈에 알 수 있고, 까미는 좀 더 지켜보고 병원에 데려가. 사료를 바꿔주던가! 근데 잘 논다며? 너무 심각한 건 아닐 거야."


"난 이렇게 조금씩 아파하는 것도 보기가 힘든데, 앞으로 까미가 죽게 될 순간이 너무 무서워"


"까미가 몇 살이지?"


"3살^^"


"야. 너무 어리잖아. 한참 활기 왕성할 때네 왜 너는 자초해서 걱정이야"


"그래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 할 거고..."


"까미가 무슨 시한부야? 왜 시한부 취급을 해. 그냥 지금의 시절을 아껴줘"



지금의 시절을 아껴줘 라는 말이 귀에 맴돌았다. 하긴 현재 시간을 충분하게 함께 보내주는 것도 아닌데 되려 십 년 남짓한 시간의 걱정을 미리 끌어다 쓰고 있는 내가 바보 같았다. 브런치의 어느 글에서 '나는 매일매일 나의 개의 죽음을 연습한다'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최근 가장 공감 가던 문장이다. 나의 개의 죽음을 연습하는 주인, 그들 모두가 그 어딘가에서 지금도 각자의 연습을 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누군가가 나의 먼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슬퍼하며 줄곧 우울해한다면 나는 어떤 심정일까. 오히려 내 마음이 더 아플 것 같다. 앞으로는 나의 강아지의 인생을 시한부로 감히 만들지 않을 것. 이것이 올해 나의 다짐 중 하나이다.




어쨌든, 누군가의 전부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가져온다.  






우리 사이에 있는 묘한 기류를 사랑한다.

그것은 아주 잠깐이지만 동시에 영원한 것이다.

허나 나는 사랑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조금 더 무르익을 것이다.

어떤 말 한마디보다 깊은 울림이 있는 여기 이곳에말하지 않고 느낌으로 더듬어보는,

경험해본 적 없는 개운함 속에서

서서히, 서서히, 그러나 반드시.

너에게 닿을 것이다.


김민준 작가 - 서서히 그러나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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