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리뷰
밤이 선생이다 라는 책은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이신 고 황현산 작가님의 생애 첫 산문집이다. 1980년대부터 2013년까지 30여 년의 세월 동안 발표했던 여러 글 중에 추리고 추려서 1부와 3부에 나눠 담았고, 2부에는 강운구, 구본창 선생님의 사진 중 책의 기저에 전체적인 비유가 될 수 있는 것을 골라 글과 함께 실었다. 책에는 총 여든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는데, 삼십여 년에 걸쳐 쓴 글이지만, 어조나 문체에 크게 변함이 없다.
이 책의 저자인 황현산 작가님은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셨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 프랑스 현대시에서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연구하며 문학비평가로 활동하셨고, 팔봉 비평문학상, 대산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등을 수상하셨다.
책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황현산 작가는 밤에 일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어둠 속에서 불을 얻어온다"는 그의 말처럼, 저자는 밝은 곳에 있는 가능성은 우리가 다 아는 가능성이고, 어둠 속에 있는 길이 우리 앞에 열린, 열릴 길이라고 언급했다.
황현산 작가가 문학비평가로 활동하며 '시적인 것' '예술적인 것'의 역사와 성질을 이해하는 일에 오래 천착해왔다고 한다. 그의 산문집을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의 산문을 읽다 보면 폭넓은 감상을 하게 된다. 노련한 어휘와 세련된 문체가 멋있다. 최근 에세이를 쓰면서 어휘에 한계를 느꼈는데, 이 책을 보면서 종일 감탄만 하고 있다. 「바닥에 깔려있는 시간」이 그랬다.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울렁거려 나는 모래 위에 누웠다. 해는 지고 하늘에는 별이 돋아 이었다. 달이 밝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옆에서 부르는 아이들의 합창이 마치 먼 나라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처럼 아득하였다. 그리고 더 먼 곳에서 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의 모든 별들이 긴 꼬리를 끌고 서서히 돌고 있었다. 모래에는 낮의 온기가 남아 있어 그것이 내 몸을 따뜻하게 덥혀주었다. 내가 어떤 커다란 손바닥 위에 누워 있고 그 손이 나를 끝없이 흔들어주는 것 같았다. 또는 내 육체가 모두 삭아내려 모래알처럼 작아진 내가 다른 모래알들 속에 묻혀 바람 따라 살랑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 p.263
글을 쓰다 보면, 어떤 순간의 감정을 길고 다양하게 표현하기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공원을 걷다가 벤치에 앉았을 때, 주변을 묘사하려면 광경을 세밀하게 관찰해야 하는데, 관찰하는 순간에도 그것을 딱히 아름답게 표현하기도, 다양하고 세련된 어휘로 바꾸기도 어렵다. 그렇다 보니 이 구절이 더욱 인상 깊었다. 자신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큰 부분(하늘, 바다, 땅)을 골라서 묘사하지만, 그것이 뭉뚱그려지지 않고 무척 세밀하여 머릿속에 한꺼번에 펼쳐진다. 정말이지 글쓰기에 탁월한 참고서다. 나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책을 읽다 보면 가끔 아득한 옛 것의 문화를 마주하곤 한다. 아마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 같은 먼 시절의 이야기를 가끔씩 한아름 풀어주시는 데, 예스러움만의 따스한 정이 느껴져 절로 그리움이 들기도 한다. 겪어보지 않은 문화이기에 더더욱 궁금하기도 했는데, 황현산 작가님의 산문은 위에서 내려오는 '말씀'의 형태라기보다는, 같이 걸음을 옮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행동'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윤리는 기억이다』 를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시작해, <살인의 추억>으로 독자들에게 물음을 던지는 이 장은, 나를 포함한 여러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주었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은 좋은 영화다. (...) 모든 예술은 왕성했던 생명과 순결했던 마음을, 좌절과 패배와 분노의 감정을, 마음이 고양된 순간에 품었던 희망을, 내내 기억하고 현재의 순간에 용솟음쳐 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방법이다. 기억이 없으면 윤리도 없다고 예술은 말한다. 예술의 윤리는 규범을 만들고 권장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날의 희망과 좌절, 그리고 새롭게 얻어낸 희망을 세세연년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준다. 미학적이건 사회적이건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 가에 의해 가름된다. 그래서 영화의 끝에서 전직 형사 박두만이 우리를 똑바로 쳐다볼 때, 그 시선은 이런 질문을 쏘아 보낸다. 당신이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 p.202
나는 유명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상한 고집이 있어서, 아직 <살인의 추억>을 접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구절을 보니, 이제는 정말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영화 <택시 운전자>를 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말자'는 다짐을 했는데, 덕분에 또 한 번 결심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늘려가자고.
2부를 읽다 보면, 작품을 설명하는 저자의 해설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본인은 예술을 잘 모르지만, 예술과 친해지고 싶어 미술관을 정기적으로 가기도 하고, 작품 하나하나를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렇다 보니 2부를 읽는 내내 예술을 대하는 저자의 신중하고도 예리한 태도가 인상 깊었고, 차분히 그림을 해석해나가는 방식이 감탄스러웠다. 예술을 바라보는 참된 자세가 있다면 이런 것일까 하는 일종의 경외심마저 들 정도였다. 물론 더욱 좋은 해설자가 많을 테고, 본인은 예술에 무지하기에 그의 해설 방식을 잘 못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자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우면서 여운이 느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지금 구본창이 찍은 사진 한 장을 앞에 두고 있다. "200305 강릉"이라고 적혀 있다. 제목일까,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어 촬영한 날짜와 장소만 적어놓은 것일까. 전경의 빈 땅에 행상용 아이스크림 수레가 하나 덩그렇게 서 있다. 그 뒤로 사진의 한 복판을 수평으로 가로질러 호수라기보다는 강이나 인공수로처럼 보이는 원경의 물이 있다. 여러 정황으로 경포호수일 것이 분명한 그 물의 건너편에, 물과 평행을 이루며 작은 구릉이 역시 한일자로 사진을 가로지른다. 구릉에는 나무가 많고, 인가이기보다는 펜션이나 카페일 것 같은 시설물들이 여기저기 작고 불분명한 형체만 드러내고 있다. 그 뒤로는 하늘이다. 중경에는, 사진의 왼쪽 구석에 치우쳐서 버드나무 한 그루가 밑동을 물가에 두고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다. 카메라의 시점을 비교적 지면 가까이에 두고 찍은 사진이어서 물은 하얀 띠처럼 좁게 보이고, 반면에 아이스크림 수레와 버드나무는 실제보다 더 우뚝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버드나무는 카메라에 다 담기지 않았다. 왼쪽으로 뻗은 큰 가지 하나와 다른 가지들의 상부가, 그리고 위로는 우듬지가 잘렸다. 버드나무는 금속성의 각진 몸체에 요란하게 색칠을 한 아이스크림 수레의 기세에 눌려 화면 밖으로 밀려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아이스크림 수레가 없었더라면, 풍경은 쓸쓸하면서도 평화롭게 보일 수 있었으리라. 아니 어쩌면 이 당돌한 아이스크림 수레 때문에 물 건너 풍경이 더 평화롭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수레는 그 요란한 색깔로 피할 수 없는 낡음에 완강히 저항하면서 "나는 여기 있어야 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이스크림 수레를 처음 보는 것처럼(사실 언제 아이스크림 수레를 자세히 본 적이 있던가?) 여러 번 되풀이해서 다시 보게 된다."
"축제가 끝난 뒤에, 굿판을 벌이던 사람들이 뒷수습을 하고, 깃발을 내리고, 인파가 썰물처럼 빠진 뒤에, 행상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도, 아이스크림 수레는 한동안 그 자리에 다시 덩그러니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박히는 인상은 조금 다를 것이다. 차곡차곡 쌓아 올려 가지처럼 하늘 뻗은 고깔과자는 줄어들고, 수레는 지친 듯이 보이겠지만, 흥분된 시간의 기억을 조금은 품고 있어서, 어느 정도는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사라진 흥분의 시체, 그 열기가 아직 다 식지는 않은 시체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아침나절의 아이스크림 수레는 그 죽음을 아직 알지 못한 채, 몰려들 인파와 함께 제 생명이 충만해지기만 기다리고 있다." - p.143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
괴테가 쓴 『파우스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여기서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220p) 다시 말해, 낮에는 현실에 치여 1분 1초가 빠듯하지만, 밤에는 낮동안 우리가 했던 일들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밤은 선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