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의 독서 기록
-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리처드 도킨스 외, 바다출판사, 143-186p
오늘 읽은 챕터는 제목부터 무척 흥미로웠다. <다윈은 어떻게 창조론자에서 진화론자로 변신했는가?>와 <종교적 믿음은 어떻게 진화하는가?>를 읽었다.
<다윈은 어떻게 창조론자에서 진화론자로 변신했는가?>에서, 다윈이 한때 모든 종은 지적 설계의 산물이라는 이론에 심취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다윈은 《종의 기원》을 통해 자연선택을 소개한 뒤에도, 여전히 설계 논증에 억누를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다행히도, 지적설계에 대한 그의 믿음은 갈라파고스 사례에서 끝을 맺는다. 갈라파고스 제도의 수많은 섬에는 같은 종이지만 서로 약간씩 다른 갈라파고스 핀치들이 있었다. 창조론에서 바라보자면, 이 새들은 각각 독자적 창조물이어야 하는데, 완벽한 설계가 가능한 지적 설계자라면 지나친 강박증이 아닌 이상 '각기 다르지만 서로 가까운' 새들을 각 지역에서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당시 지적 설계에 빠져있던 다윈은 이 모든 새들이 매우 가까운 관계이고, 서로 다른 섬에서 '진화'한 결과 생겨났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처럼 지리적 분포에 대한 증거, 특히 대양의 섬들과 그 섬들이 가장 가까운 대륙과 맺고 있는 생물학적 관계에 대한 증거는 다윈이 그 주제를 논하기 전까지는 철저히 간과되어 왔다.
그 후 다윈은 1836년 조류 전문가 존 굴드와의 토론을 통해, 갈라파고스 핀치들이 유연관계가 매우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고, 지리적 격리가 종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는지 답을 찾아 나갈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을 통해 '종이 지역 환경에 대해 보이는 적응성'을 설명할 메커니즘 이론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창조론의 완전한 오류를 발견했고, 그 후 20년이 넘도록 꾸준히 검증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렸다.
찰스 다윈이 한때 창조론을 따른 것처럼, 지적설계론은 과학의 한계를 교묘히 파고들어가 혼란을 야기한다. 다행히 찰스 다윈은 운명적인 갈라파고스 방문과 그 밖의 다른 항해 경험 덕에 진화론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가설-연역법이라고 부르는 방법론을 채택함으로써 과학적 탐구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가설을 세우고, 이에 따라 예측을 하고 관련 증거를 수집한 다음, 이 정보에 근거해 그 가설을 확증하거나 버림으로써 창조론의 부적절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찰스 다윈은 자신이 한때 창조론에 완전히 매료됐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후 20년이 넘도록 창조론의 오류와 진화론의 이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과학자가 아닌 '대중'이 지적설계의 표적이 된다면? 이미 미국의 일부 고등학교에서는 생물학 시간에 지적 설계론을 배우고, 윌리엄 페일리 등 일부 박사 및 교수들은 지적설계 관련 저서를 출간했다. 기존 과학자들마저 변질되고 있는 상황 속에, 과학적 탐구 정신과 그 전문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대중이 지적 설계론의 타깃이 된다면, 상당히 위험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직접 나서서 지적 설계론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 위험성을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저서진과 내용에 비해 가격이 무척 싼 이유를 여기서 깨달았다.
<종교적 믿음은 어떻게 진화하는가?>를 읽으면서는 종교와 과학이 마치 개와 고양이 사이 같다고 느껴졌다. 서로 대체할 수 없지만, 인간에게 똑같이 사랑받고 있어서 그런 걸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과학은 결코 종교를 대체할 수 없다. 과학은 오직 '이렇게 할 수 있다'거나, '이렇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지만, 종교는 나아가 우리의 깊은 정서적 갈증과 사회의 근본적인 도덕적 필요를 다룰 수 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인류가 자연의 물질적 비밀을 풀기를 원하는 한, 종교도 과학을 대신할 수 없다.
종교는 인간이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직면하면서 발전했고, 물질적 사건이 아닌 도덕적 사건의 판단을 위해 진화해왔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일상적 사실 및 논리와 모순되고 개인적 희생을 요구하는 초자연적인 세계를 받아들일까?" (즉 종교적 믿음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예를 들면 지적 설계론자들은 지적설계론의 비과학성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왜 계속해서 그 믿음을 진화시키려 하는 걸까? 책에 따르면 그 이유는 도덕적 합의를 이성과 의심을 초월하는 '어떤 신성한 것'으로 바꿈으로써 일종의 '결속'을 얻기 위함이다. 즉, 보다 강렬하고 친밀한 집단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과학은 인간을 우주 속의 부수적 요소로 취급하지만, 종교는 인간을 중심에 놓는다. 결국 종교는 과학이 갖지 못한 특성을 가짐과 동시에, 죽음과 같은 실존적 불안에 의해 계속해서 진화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적 설계는 그 의도적인 원인을 과학에 재도입하려 하고 있다. 과학을 대신할 수 없는 종교가 과학을 대체하려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앙숙처럼 보이지만, 음악의 경우처럼 조화를 통해 발전 가능하기도 하다. 개와 고양이가 무조건 앙숙 관계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즉 둘은 무척 다르지만, 서로 다른 특징을 상호 보완함으로써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중요한 것은 '선(line)'이다. 지적 설계론은 과학과 종교 간의 '선'을 넘어, 자신이 마치 '과학'인 것 마냥 행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진화론의 대안 이론을 자처하는 것에서 나아가, 고등학교 생물학 교과서에까지 그들의 이론을 전파할 셈이다. 과학자들이 직접 나서서 지적설계론을 막는 이유를 여기서 깨달았다. 과학자들은 지적설계론 자체의 오류뿐만 아니라, '지적 설계론'이 '과학적 종교'로서 결속되는 문화적 현상까지 막으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