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4일의 독서기록
카프카가 보여준 문학에 먼저 가닿았던 로베르트 발저, 20세기 산업 사회의 광기와 그늘을 보여주다.
"산책은 말입니다. 활기를 찾고, 살아 있는 세상과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대한 느낌이 없으면 나는 한 마디도 쓸 수가 없고, 아주 작은 시도, 운문이든 산문이든 창작할 수가 없습니다. 산책을 못 하면 나는 죽은 것이고, 무척 사랑하는 내 직업도 사라집니다. 산책하는 일과 글로 남길 만한 걸 수집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록할 수 없고, 긴 노벨레는 물론이고 아주 짧은 글마저도 쓸 수 없습니다. 산책이 없다면 나는 그 무엇을 인지할 수도, 스케치할 수도 없습니다." - 『산책』에서
『산책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이라는 이 책은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 작품 중에서도 가장 널리 읽히며 나날이 화자 되고 있는 『산책』을 필두로, 11편의 다채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작가 본인의 예술관을 보여주는 『툰의 클라이스트』, 『시인』, 『작가』와 대표작 『벤야멘타 하인 학교』의 모티프와 주제 의식을 보여주는 『어느 학생의 일기』, 『그것이면 된다』등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산책』과 『그것이면 된다』를 읽으면서 그 구조나 문맥에서 상당히 많은 충격을 받았는데, 개인적으로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면서 느꼈던 충격보다 훨씬 컸다. 그도 그런 게 이야기가 느닷없이 시작되거나 끊기며, 글의 흐름은 개연성이 없고 거의 의식의 흐름에 따른다. 또 상식을 파괴하는 단어나 시제를 사용하기도 해서, 읽다가 갑자기 '응?' 하는 순간이 굉장히 많았다.
화자가 마을을 돌며 서점에 들러 잘 팔리는 책을 살피기도 하고, 어느 귀부인이 마련한 점심 식사에 초대받았다며 자랑하기도 한다. 그러다 갑자기 주인공을 환대하던 귀부인이 돌연 협박을 하고, 화자는 작가이면서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자신의 삶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돌연 중단하기도 하고, 화자의 감정 또한 기쁨, 두려움, 절망, 희망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처음에는 생소해서 '이게 뭔가'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저자가 의도적으로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놀라움과 경외감을 느꼈다.
『산책』이라는 작품에서는 문학적 충격을 받았다면, 『그것이면 된다』랑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뭐랄까, 뒤통수를 망치로 짧고 굵게 맞은 느낌?을 들게 해 준 작품이었다. 저자는 두 작품을 통해 시민에게서 발언권을 빼앗고 그들이 침묵하고 복종하기만을 바라는 권력자들, 노동자가 기계처럼 일만 하고 어떤 불만도 품지 않길 원하는 자본가들을 비판함과 동시에 독자들에게도 따끔한 충고를 던져 준다. 2~3페이지 남짓 안 되는 아주 짧은 분량이지만, 그 심오함은 수전 손택의 마음을 흔들만 했다.
읽다 보면 비인간화라던지, 인간 소외와 고독, 그리고 황금만능주의 같은 인간 사회의 섬찟한 일면이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이 오늘날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은 독자로 하여금 서늘한 기분을 가져다준다.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들이 왜 과거보다 오늘날 들어서 더 중요하게 읽히는지 그 이유를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