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내가 죽였어.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하니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리뷰

by 수빈 Soobin

이 책이 맨부커상을 받고 영어권 최고의 문학으로 칭송받는 이유 중 하나는, '평범한 인간'도 충분히 문학적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작 중의 주인공은 '자기 인생은 지극히 평범하다' 면서, 소설적인 매력이 하나도 없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책을 덮고 나면 우리는 '누구나 소설 속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조금은 소름 돋는 결론이다.


#1. 책 소개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는 2011년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유명한 줄리언 반스의 장편소설이다. 1인칭 화자의 시점을 통해 불완전하고 믿을 수 없는 인간의 기억과 시점의 왜곡을 엿볼 수 있고, 마침내 진실이 드러날 때 묵직한 메시지를 받게 되는 '기억과 윤리의 심리 스릴러'라고 볼 수 있다.


#2. 저자 소개

우선 영국 대표 작가인 줄리언 반스는 『메트로랜드』로 서머싯 몸상을 받아 화려하게 등단했다. 활동하면서 프랑스 메디치상, 미국 문예 아카데미의 E.M. 포스터상, 독일 구텐베르크상, 이탈리아 그린차네 카부르상, 프랑스 페미나상 등 유럽 대부분의 문학상을 석권한 실력파 작가다. 특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경우, 심사위원들이 본심을 시작한 지 단 31분 만에 전원 일치로 뽑혔고 여론도 줄리언 반스에 대한 극찬으로 가득했다고 하니, 생각보다 대단한 작가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모르는 위대한 작가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3. 줄거리

소설은 1960년대, 고등학교에서 만난 네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1인칭 화자인 주인공 토니 웹스터와 그의 패거리 친구 앨릭스, 콜린, 그리고 총명한 전학생 에이드리언 핀. 세 소년은 에이드리언의 탁월한 지적 능력과 독특한 시각을 눈여겨보고 그를 아낀다. 그 후 대학생이 된 토니는 베로니카와 교제를 하게 되는데, 그녀의 집을 방문하면서 계급적 격차를 느끼고 위축감을 받는다. 베로니카의 어머니로부터 "그녀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 마"라는 묘한 충고를 듣기도 한다.


결국 토니와 베로니카는 서로 맞지 않아 헤어진다. 그런데 얼마 후, 토니는 베로니카와 사귀게 되었다는 에이드리언의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토니는 마음이 상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용인한다는 내용의 짧은 편지를 보낸다. 그 후 40년의 세월이 흐르고, 1부가 끝난다.


2부 시작. 60대가 된 토니에게 20대 시절 잠시 사귀었던 베로니카의 어머니, '포드 부인'에게서 느닷없이 유언장 한 통이 날아온다. 500파운드의 현금과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남기겠다는 것. 어째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포드 부인이 갖고 있었으며, 그녀는 왜 그것을 토니에게 남겼을까? 그리고 500파운드의 의미는 무엇일까? 토니는 이 사실을 알기 위해 베로니카에게 연락하고, 40년 전, 자신이 보냈던 또 다른 편지 한 통과 함께 거대한 비극에 마주하게 된다.


#4. 이 책의 포인트

사실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역사에 길이 남을 고전으로 자리 잡는 게 쉽지는 않다. 그런데 맨부커상 심사위원장인 스텔라 리밍턴은 시상식장에서 '이 책이 영문학의 고전이 될 것'이라 단언했다. 두 번 세 번 거듭해 읽어도 매 번 새로운 깊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근데 정말 이 말이 맞는 게, 어쩔 수 없이 궁금해서라도 이 책을 두 번 읽게 된다. 처음엔 지루하기 그지없었던 주인공의 독백들이, 실은 엄청난 실마리들이었음을 완독 후에 깨달았다. 그래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주인공이 어떤 말을 했는지 찾아보곤 했다. 그러므로 기억의 '왜곡'과 '간극'이라는 주제가 어떻게 드러났는지 생각하면서 읽으면 작품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이 듦, 기억, 그리고 후회의 감정을 치밀하고도 정교하게 사유한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생각 하나하나를 놓치지 말자. 그것을 기억하면서 후반부에 접어들면 분명 온몸에 전율이 퍼질 것이다.


#5. 기억의 왜곡성

이 책에서 나왔듯이, 역사는 기억의 불완전성과 기록의 불충분성이 만나는 점에서 생산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초반부에 주로 나온 철학적 이야기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의미를 곱씹을 만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인간의 기억을 다룬 철학서의 측면도 갖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주인공의 불완전한 기억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보호적인, 어떤 면에서는 본능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기억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76페이지에 주인공이 한 말이 마음 깊이 와 닿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는 지금 당시에 일어난 일을 내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시에 일어난 일을 내 입장에서 해석한 것을 기억에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p.76"


역사가 기억의 불완전성과 기록의 불충분성이 만나는 점에서 생산된다면, 주인공의 불완전한 기억은 이기적인 것일까?


#6. 평범한 주인공에게서 나오는 문학적 힘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 p.101


이 책은 한평생 '문학의 소재가 된 적이' 없을, 평범한 삶을 살아왔고, 비굴하게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토니는 젊은 시절 교사의 질문에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대답했지만, 노년에 이르러서는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가깝다'라고 번복한다. 주인공이 곧, 우리, 그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일 수도 있다는 저자의 묵직한 메시지가 저한테는 큰 센세이션이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회한이 담긴 말 하나하나가 내겐 비수처럼 다가왔고, 얼마 되지 않는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게 되는 그런 울림이 있었다.


#7. 아쉬웠던 부분

아무래도 스릴러라고 여러 곳에서 소개를 했고, 워낙 책 겉면이 극찬으로 덮여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대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스릴러라고 하면 보통 막 몰입하면서 두근두근하면서 볼 줄 알았는데, 예감이 정확히 틀렸다. 또 기대를 너무 했다 보니 결말 부분이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좀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질질 끌려가다가 갑자기 확 줄을 놓아버리는 느낌? 그래서 독자가 넘어지고 아수라장이 된 심경이랄까. 그래서 너무 기대를 갖고 읽기보다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야 더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또 이 책이 번역에 관해 말이 많다. 원서로 읽으면 내용 자체가 철학적이라고 하는데, 번역본 문체나 단어가 생소해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거 같긴 했다.


#8. 한 줄 평

문학성은 소재도 참신하고, 아무튼 여러 방면에서 내겐 읽어야 할 이유가 많은 책이었다.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의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자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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