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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살롱 Mar 29. 2022

세계 명문가의 지속가능경영

가문의 이름값을 지키는 명문가에는 이타적인 전략이 있다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명문가들이 있다. 우리나라는 12대, 300년에 걸쳐 만석꾼 전통을 이은 경주 최부자집이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야기할 때 대표적으로 언급된다. 가문 또한 하나의 기업인데 이렇게 오래도록 지속 가능한 부를 유지하면서도 명망 높은 기업 가치를 유지하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만의 특별한 지속가능경영 전략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경주 최부자집의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한 가훈처럼.

자산 규모 100억, 200억대의 금융사 VVIP 자산가의 바람을 들어보면 어떻게 하면 자신의 집안을 명문가로 만들 수 있을지에 관심이 많다. 내 손자를 넘어 대대손손 우리 집안이 당대의 시대 정신을 이어 사회의 큰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길. 명문가를 구축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명문가의 생명은 부가 아닌 존경받는 리더십

한 집안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를 만드는 것. 이보다 더한 가문의 영광이 있을까. 명문가는 그저 한 집안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인류 문명의 역사와 큰 연결고리를 갖는다. 왜일까?

이유는 ‘무엇이 명문가를 만드는가’라는 물음의 답에 있다. 그것은 존경이다. 부는 축적하되 인심을 얻지 못한 부자가 부지기수인 가운데 그들은 달랐다. 위기의 순간 또는 사회적, 정치적 혼란기에 엄청난 부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명문으로서의 기틀을 잡았다. 그리고는 지속적으로 흔들림 없는 도덕적 카리스마와 남다른 리더십으로 존경을 얻었다. 가문의 일가만이 아닌 주변 모든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돌보며 보다 나은 이상향의 사회를 만들고자 기꺼이 부를 나누었다. 오늘날, 명문가의 이러한 나눔의 정신은 시민과 국민을 하나로 묶었고 미래를 꿈꾸게 했으며 이것이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것이다.

그들을 명문가의 사람들이게 하고, 조연을 자처하지만 역사의 주연 자리에 놓이게 한 존경의 리더십. 그 리더십은 수백년을 관통하여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 인류 문명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표적인 명문가 세 곳을 통해 이들의 리더십과 나눔 정신을 우리 집안의 지속가능경영으로 가져오면 어떨까?


미국 록펠러 가(家), 다인종 다문화 국가를 하나로 만드는 기부

미국은 세계에서 기부문화가 가장 발달한 나라이다. 이러한 미국 부자들의 기부문화 역사의 시초가 된 것은 ‘석유왕’ 존 록펠러이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못하고 일찍부터 사업가로 첫발을 내디딘 그는 1863년 석유 산업에 뛰어들었다. 1870년에는 스탠더드 오일 회사를 설립, 미국 내 정유소의 95%를 독점하는 미국 최대 정유 회사가 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하여 그는 악덕기업주로 악명이 높았다. 그를 바꾼 건 독점 체제에 대한 법원의 위법 판결이었다. 이때 재계에서 은퇴한 후 자선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당시 록펠러가 입원비가 없어 어려움을 겪던 한 소녀를 도와주고 그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자 “나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라고 기쁨을 표현한 일은 유명하다. 그는 거금을 투자해 시카고대학을 세웠으며, 록펠러 의학 연구소를 설립하는 데에도 많은 돈을 기부했다. 1913년 5,000만 달러를 투자해 설립한 록펠러 재단이 전개한 병원, 교회, 학교 등의 자선사업이 현재까지 미국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하다.

출신지역, 인종과 언어가 다른 미국 국민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하나가 되게 만드는 원동력에는 바로 최고의 갑부가 실천한 베풂과 나눔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 록펠러 가가  사회에 환원한 막대한 부는 미국 사회 전반에 기부문화가 뿌리내리는 자양분이 되었고, 현재는 워런 버핏이 록펠러 가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2010년, 워런 버핏과 빌게이츠는 미국의 억만장자들에게 최소 전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도록 권하는 '기빙플레지(Giving Pledge)' 모임을 시작했는데 워런 버핏은 2020년까지 총 기부액이 44조원에 이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국을 위대한 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록펠러 가 같은 큰 가문이 뿌리내린 봉사 마인드와 사회가 잘못되려할 때 제 목소리를 내는 공정심이 나라를 튼튼히 받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家), 이들이 없었다면 인류에게 르네상스 문명은 없었다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는 막대한 부를 이룬 기업인 명문가들이 자선사업을 통해 사회를 발전시켜왔다면, 유럽은 부(富) 자체보다는 문화와 예술을 얼마나 이해하고 후원하는가가 명문가의 잣대가 되어왔다. 중세와 근세 유럽의 대표적 명문가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가 좋은 본보기다.

메디치 가가 없었다면 인류에게 르네상스 문명은 없었다. 천동설을 진리로 여기는 중세 카톨릭 사회에 반하여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과학으로 맞선 갈릴레오 갈릴레이, ‘최후의 심판’, ‘천지창조’, ‘피에타’ 등의 걸작을 남긴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그들이 사회적 억압과 가난한 생계로 고통받을 때 뒤를 묵묵히 받쳐주며 재능을 펼치게 했던 것은 메디치 가문이었다. 메디치 가의 기부는 여러 대에 걸쳐 축적된 아름다운 가풍이었다. 평상 시에도 검소했던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은행업으로 번 돈을 로렌초 기베르티가 피렌체 세례당 청동문 ‘천국의 문’ 제작을 하는 27년간 꾸준히 후원했으며 그의 아들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는 플라톤 철학에 감명을 받아 고대 문서를 사들이고 산마르코 수도원에 도서관을 세웠다. 이것이 이탈리아 최초이자 유럽 최초의 공공 도서관이었다. 또한 그가 세운 플라톤 아카데미는 최고의 예술가와 학자들이 모여 서로 교류하는 지식의 광장이 되었다. 그 뒤 ‘위대한 로렌초’라고 칭송받은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드디어 피렌체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14~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 부흥 운동인 르네상스 문화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마침 피렌체와 메디치 가의 번영은 정점에 올랐다. 이를 견제한 나폴리 국왕과 직접 담판을 지어 피렌체에 평화를 가져오는 한편 피렌체의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를 후원하였다. 당시 활발한 무역으로 부를 쌓은 부자들이 예술품을 사들이기 시작했으나 돈을 버는 것은 중개상이었고 정작 예술가들은 가난에 시달렸다. 이때 로렌초가 처음으로, 예술가에게 직접 작품을 주문하고 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예술가를 직접 후원하는 문화를 탄생시킨 장본인이 바로 메디치 가문인 것이다.

1737년 메디치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기록인, 궁전, 미술관, 도서관, 은행, 교회, 수도원 등 건축물들은 르네상스 부흥의 토대가 되었고 지금도 자랑스러운 이탈리아 문화유산으로 숨쉬고 있다. 또한 인간이 창조한 모든 것을 존중하는 르네상스 인문주의로 전 인류의 정신에 도도히 흐르고 있다.



스웨덴 발렌베리 가(家), 드러내지 않는 거인의 사회환원

발렌베리 가는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스웨덴 기업집단을 경영하는 대표적인 기업경영 가문이다. 스웨덴 2위 은행인 SEB, 일렉트로룩스, 에릭슨, 사브 등 100여개의 계열사를 보유하며 340조 원 가치의 회사를 경영하는 발렌베리 가. 1856년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창업한 이후 160여 년간 5세대에 걸쳐 가족승계를 하고 있음에도 스웨덴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가족 경영기업의 모범이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발렌베리 가의 아들들은 무조건 스웨덴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창업자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는 스웨덴의 미래를 개척하려면 바다로 나가야 한다고 믿었고 거친 바다 생활이 강인한 정신력과 넓은 시야를 길러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녀를 매우 검소하고 엄격하게 길렀기 때문에 스스로 돈을 벌어 유학을 가는 것 또한 당연한 가풍이었다. 이렇게 길러진 유능하고 책임감 있는 후계자들도 항상 두 명의 리더 자리에 놓여 경영능력을 견제받고 균형감을 유지해야 한다.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 발렌베리 가는 대중 매체의 조명을 받는 것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언제나 자신들의 역할을 찾아 함께했다. 미터법 도입과 여성 해방에 이르기까지 스웨덴의 근대 개혁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전쟁 중에는 외무 장관을 맡아 심각한 무역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1917년 이래로 발렌베리 재단은 여러 기부활동을 이어왔으며, 특히 과학 분야에는 매년 3억 달러를 집중적으로 지원하여 기초과학 분야의 스웨덴 노벨상 수상자 중 발렌베리 재단의 도움을 받지 않은 과학자가 없을 정도이다. 이뿐만 아니라 실업자와 가족 지원 재단을 설립하는 등 많은 활동을 펼쳐 스웨덴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발렌베리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최고경영자가 아닌, 2차 세계 대전 중 외교관을 지낸 라울 구스타프 발렌베리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점령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외교관 신분으로 헝가리의 유대인 수십만 명을 스웨덴으로 탈출시켜 ‘스웨덴의 쉰들러’로도 불렸으며, 전쟁이 끝나기 직전 러시아 어딘가에서 실종된 전쟁영웅이다. 자유를 사랑하고 모험을 즐기며, 언제나 약한 자를 대변하는 인류의 외교관이었던 그는 스웨덴이 아닌 여러 나라에서 기억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거리와 공원을 만들었고, 미국에서는 라울 발렌베리를 기리는 위원회가 만들어져 매년 10월 5일을 ‘라울 발렌베리의 날’로 정해서 추모하고 있다. 스웨덴에서 발렌베리 가는 자본주의, 힘, 봉사를 상징한다. 160년 동안 스웨덴의 주류 세력이었음에도 그들은 나서거나 옳지 않은 방향으로 힘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나라와 국민, 나아가 정의를 위해 헌신하며 자유를 수호한 발렌베리 가의 희생에 어쩌면 스웨덴은 물론 전세계 인류가 빚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개인의 차원에서 산불 피해 이재민에게 성금을 보내고, 작은 소품이라도 불법 카피 제품은 사지 않고 창작자를 후원하기 위해 그들의 창작물을 구매하는 행동, 나를 넘어 우리를 위하는 실천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행위,  모든 것이 올바르고 귀한 마음이다.  귀한 마음이 하나하나의 벽돌처럼 가정에 쌓인다면 그것이 명문가가 아니고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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