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도사로 가는 길

혼자 하는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

by 숲피

멘도사(Mendoza)로 가는 길


혼자 맞이하는 첫 아침이 밝았다. 버스는 여전히 달리고 있고, 구겨져 있던 몸을 쭉 펴며 눈을 떴다. 하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기분이 좋지가 않다. 누군가와 함께일 땐 혼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음에도 막상 진짜로 혼자가 되고 나니 무서운 마음이 솟구쳤다.


혼자이려고 떠난 여행에서 좋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 각자의 방식과 생각으로 떠나온 멋진 사람들. 짧은 시간이었지만 늘 누군가와 함께 하다 보니 혼자가 될 게 어느새 두려워졌나 보다. 무엇보다 앞으로 예기치 못한 변수나 돌발 상황들, 외부 요인이 주는 충격들을 모두 홀로 견뎌 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게 가장 무서웠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여행에서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휘휘 맴돌았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하며, 무엇이 이렇게 두렵고 무서울까. 생각은 자책으로, 그리고 다짐으로 이어졌다. 씩씩하자, 씩씩하자.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었다.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혼자임에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을 테니.


당장 알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벌어지지 않은 일을 붙잡고 애써 알려고 고민해봐야 아무 소용없으니까. 그저 지금 바라는 건, 결국 이 모든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면 한다는 것. 그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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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에서 나누어 준 식사.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약 열여덟 시간의 이동이 끝나고, 찌뿌둥한 몸을 끌어내리며 그새 지긋지긋해진 버스에 안녕을 고했다. 그렇다면 이제 할 일은 다음 행선지로 가는 버스표를 미리 끊어두는 것. 그래야만 다시 버스 터미널에 들를 수고를 덜 수 있고 좋은 자리를 선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가려는 날짜와 시간에 버스표가 동날 위험이 줄기 때문이다.


내 몸만 한 배낭을 둘러 매고, 다음 목적지인 칠레의 산티아고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다. 다다음날 표를 미리 끊어서인지, 다행히 원하는 자리를 선점할 수 있었다. 내 자리는 2층 버스 맨 앞자리, 그것도 창가 좌석. 앞이 통유리라 풍경을 보며 갈 수 있어 지루하지 않고, 다리를 뻗을 공간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자리. 게다가 멘도사-산티아고 구간은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는 구간이기 때문에, 눈앞의 탁 트인 창은 충분한, 아니 충분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멘도사에서의 시작이 좋다. 하지만 숙소를 찾아가는 내내 배낭을 잘못 맨 건지 어깨며 등허리가 눌리고 눌려 곧장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다행히 숙소가 터미널과 그리 멀지 않아 뼈의 온갖 마디가 무너져 내리기 직전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고맙게도 방도 미리 준비가 되어 있어 이른 체크인이 가능했다.


이미 다들 한창 밖에 나가 있을 시각이라 조용한 숙소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니 정오가 지났다. 자, 그럼 멘도사에선 무엇을 해 볼까. 한국에서부터 챙겨 온 가이드북을 펼치니 와이너리 얘기뿐이다. 투어로 갈 수 있는 유명한 와이너리와 자전거를 타고 개별적으로 다녀올 수 있는 와이너리도 몇 곳 소개되어 있다.


'흠… 와이너리라….'


고민이 됐다. 멘도사는 아르헨티나 와인 생산량의 약 70%를 담당하고 있을 만큼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렇다면 와이너리를 가야 할까? 와인으로 제일 유명한 곳이라는데? 하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데…. 아마 멘도사에 오는 사람이라면 열이면 열 와이너리를 가고도 남을 거야. 하지만 남들 다 간다고 가는 게 무슨 소용인데?


고민은 계속됐다. 가이드북과 인터넷을 뒤지고 호스텔 직원에게도 물어가며 고민하다, 결국은 마음이 가장 끌렸던 '선셋 홀스 라이딩' 투어를 신청했다. 다른 누군가의 의견 단 1%의 개입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만약 지금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내 성격상 이렇게 갈등되는 상황에선 분명 그 누군가의 의견이 120% 반영되고도 남을 터였다.


제삼자의 생각의 개입 없이 오롯이 내가 원하는 걸 찾아내야만 하고, 찾아내게 되어 있으며, 결국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 누군가와 함께일 때 서로 한 발짝씩 양보하며 즐거운 여행을 꾸려갔던 것과는 다른 점이다. 무엇이 낫고 좋다고 할 순 없지만, '결국 내가 선택하게 되는 것이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렇게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의 장점도 하나둘 발견해가고 있었다.




그 날의 황혼은 절대 잊지 못할 거야


오후 네 시. 생애 처음으로 말을 타러 간다. 투어 참가자는 미국에서 온 메건과 독일에서 온 루이스, 그리고 나. 와이너리가 워낙 유명한 도시여서인지 여기에서 말을 타려는 사람은 우리 셋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랬기에 오히려 살뜰하고 다정한 그녀들과 금세 친해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숲길을 달려 곧 아름다운 산장에 도착했다. 통나무로 지어진 산장 안엔 그림 같은 풍경을 담은 창문이 활짝 열려 있다. 자신을 대니라 소개한 남자가 마테차(Mate Tea; 마테나무 잎을 넣고 우린 남미식 차)를 내어 왔다. 우리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안주 삼아 마테차를 차례로 홀짝였다. 실제로 아르헨티나에는 하나의 마테 통과 빨대로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마시는 전통이 있는데, 이는 상대를 친구로 여기고 환대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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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장의 풍경, 그리고 마테차.


곧 대니의 도움을 받아 한 명씩 차례로 말에 올랐다. 말의 등은 높았고, 작은 움직임조차 고스란히 느껴졌으며, 살결은 따뜻했다. 하지만 승마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우아하게 뻗은 말의 등에 앉아 우아하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황량한 들판을 멋지게 달리는 상상을 했는데,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현실엔 낭만 따윈 없었다. 두터운 안장을 얹었음에도 말의 등뼈에 눌려 엉덩이가 미친 듯이 아파오고, 왼쪽 발목이 발걸이에 자꾸만 쓸려 까져버린 살갗이 따가웠다. 그래서 말이 대니의 뒤꽁무니를 따라 뛰려고 할 때마다 속으로 얼마나 많은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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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가는 친구들과 대니.


하지만 장엄한 풍경은 아픔마저 잊게 했다. 해가 산 너머로 차츰 넘어가며 곧 다가올 어둠을 미리 경고하듯 온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이 순간만큼은 말 많던 대니도, 흥 넘치던 메건과 루이스도 조용했다. 그 순간 난 혼자였다.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회빛 산맥 아래 선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자연은 말이 없다. 불어오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찬찬히 쓸어 넘겼다. 묵묵한 자연 안에 잠깐 왔다 가버릴 뿐인 내가 서글펐다. 곧 들판에 어스름이 졌고, 발길을 돌려 땅거미가 내린 길을 되밟았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IMG_1217.JPG ▲ 황혼의 승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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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J06453.JPG ▲ 어스름이 내려앉은 산장의 풍경.


돌아온 산장에서 따뜻한 불빛이 밝히는 테이블 아래 대니의 가족과 다 함께 저녁을 들었다. 단란했던 식사가 끝나고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는 우박이 떨어졌다. 생애 처음 보는 우박. 차창을 거세게 때리는 요란한 소리가 차츰 잦아들고, 거리엔 어둠만큼이나 적막한 고요가 내렸다. 나는 꿉꿉해진 공기를 가르며 밤거리를 달렸다.




혼자라서 얻을 수 있는 것들 -Ⅰ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 호스텔 같은 방 친구들이 오늘은 뭘 할 거냐고 물어본다. 아마도 시내 구경을 할 것 같다고 했더니 같이 가잔다. 그녀들은 스물두 살의 클라라와 스무 살의 플로르. 플로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신으로, 오스트리아에서 교환학생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온 클라라와 멘도사로 함께 여행을 왔다고 했다.


살가운 그녀들은 전날 만들어 뒀다는 엠파나다(Empanada; 다양한 속재료를 채워 구운 만두)를 기꺼이 나누어 줬다. 혼자 걸었다면 멀게 느껴졌을 길이 밝고 사랑스러운 그녀들과 함께 걸으니 짧게만 느껴졌다. 시종일관 웃음이 터졌다. 나보다 몇 살은 어린, 게다가 장난기까지 많은 그녀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당찼고 힘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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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파나다, 그리고 그녀들. 플로르와 클라라.


하지만 그녀들은 어렸지만, 또한 성숙했다. 그냥 지나쳤을 법한 작은 박물관도 흔쾌히 들르려던 둘의 모습은 굉장히 인상 깊었다. 나라면 이런 작은 도시의 작은 박물관쯤 지나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도시에 대해 알기 위해선 이것저것 해 보아야 한다며, 여행객들이 한 도시에서 너무나 짧게 머무는 것을 아쉬워하던 그들. 단순히 예쁜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게 아니라, 그 도시와 그 나라를 잘 알기 위해 여행한다는 말이 놀라웠다.


그녀들은 나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보여주려 했다. '에스파냐 광장'에서 중앙에 놓인 조각과 새겨진 벽화를 보며 나에게 아르헨티나의 독립 역사를 설명해 주던 플로르. 과연 나는 한국에 방문한 외국인 친구에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시종일관 장난치며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에 그녀들을 마냥 어리게만 봤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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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스러운 그녀들과. 왼쪽은 플로르가 열변을 토했던 에스파냐 광장이다.


하지만 아쉬운 이별은 항상 조금 더 빨리 찾아오는 법이다. 다음 날 아침, 그녀들과 나는 마지막 식사를 해야 했다. 일찍 찾아온 이별이 아쉽기만 했다. 나에게 행운을 빌어 주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따뜻한 말을 끝으로,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나. 길 위에서."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짧지만 항상 강렬하고 진한 여운을 남긴다.




혼자라서 얻을 수 있는 것들 -Ⅱ


멘도사의 그녀들이 남긴 짙은 아쉬움을 뒤로하고서 나는 산티아고로 간다. 한숨을 쉬며 산티아고발 버스에 올라타는데, 어떤 여성분과 눈이 마주쳐 서로에게 미소 띤 인사를 건넸다. 자리에 앉고 보니 그녀와 마침 같은 줄이다. 그녀는 스위스에서 온 알렉산드리아라고 했다. 우연한 시작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그녀는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혼자 멀리 떠나 온 나를 보고 젊었을 적 자신을 떠올리게 한다며, 그녀는 혼자라 가끔 힘들 때도 있다는 내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이든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여행길 위에서 큰 도움이 될 거라고. 그녀 자신도 가끔은 힘이 들고 집이 무척이나 그리울 때도 있단다. 하지만 여행을 너무나 사랑해서, 여행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힘든 점들까지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기에 그녀는 끊임없이 배낭을 싼다.(실제 그녀는 현재 기약 없는 여행 중인 작가이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중 그녀가 말했다.


"우리 닮은 점이 참 많은 것 같아. 소울 시스터처럼! 우리 산티아고에서 밥 한 끼 하자.”


어쩌면, 누군가와 내내 함께였다면 만나지 못했을 소중한 인연들. 우연찮게 주어진 선물, 혹은 행운과도 같은 시간들. 이는 내가 혼자였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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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데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에 가는 길.




혼자 걷는 길, 결국 그 위에서 채워지는 건


씩씩하게 혼자 떠나왔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남미 첫 여행지인 브라질에서부터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쭉 함께했던 동행이 있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였기에 욕 한번 시원하게 하고 치울 수 있었고, 다급한 상황에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에도 함께여서 걱정이 없었다. 둘이면 어떤 상황도 마주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난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많은 의지를 했다.


떠나오며 온갖 씩씩한 척은 혼자 다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나 보다. 향후 일정이 달라 동행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을 때, 실은 두려웠다. 외로움 보다도 혼자 겪어내야 할 모든 것들이 걱정됐다. 마음에 걱정 나무라도 심은 것처럼 생각을 하면 할수록 걱정은 줄어들지 않고 쑥쑥 자라나기만 했다. 원래 계획했던 것처럼 그저 혼자 길을 걷게 됐을 뿐인데도.


하지만 정말로 혼자가 된 순간, 어떤 의미로 나는 또다시 혼자가 아니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자연스레 친구가 됐다.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동질감에 처음 보는 서로에게 수월하게 말을 건넬 수 있었고, 내가 혼자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좀 더 편하게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혼자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 그들은 내 곁에서 내 시간과 공간을 다채로운 색깔로 칠해주었다. 나는 앞으로도 구태여 빈 옆자리를 채우기 위해 애써 누군가를 찾아 헤매진 않을 것이다. 그 빈자리도 결국 누군가로 채워지기 마련일 테니. 그저 누구든 편안하게 와서 앉았다 갈 수 있도록, 그 빈자리를 활짝 내어 놓아야겠다.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Tip>
*멘도사에서 산티아고로 넘어갈 예정인 여행자는 가능하다면 버스 2층 맨 앞자리를 사수할 것. 같은 자릿값이지만 수 배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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