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나는 다시 혼자가 됐다
고대하던 일요일,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이자 산텔모 시장을 가는 날이다. 매주 일요일에만 열리는 산 텔모 시장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이라면 꼭 가고 싶어 하는 장소 중 하나이다. 도대체 산 텔모 시장이 어떤 곳이길래 다들 가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기에 아침 일찍 들뜬 마음으로 남미 사랑을 나섰다.
남사를 나서 일자로 난 길을 따라 쭉 걸어 올라가면 산 텔모 시장의 초입에 도달한다. 아직은 조금 이른 시간이었는지, 도착하니 상인들이 한창 좌판을 깔고 있는 중이었다. 시장이 열리는 중심 길을 따라 양 옆에 늘어선 알록달록한 장식품들이며 아기자기한 자석, 옷가지, 가죽으로 만든 제품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시간이 흐르자 길이 더욱 활기차게 붐비기 시작했다. 어느새 배로 늘어난 사람들 틈을 헤치고 걷다 마주친 남사에 함께 묵고 있는 여행자들은 마지막 쇼핑 혼을 불태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곧 한국에 돌아가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 줄 선물을 사려고 두 눈에 불을 켜고 좌판을 훑는다. 나는 여행 초반인지라 벌써부터 짐을 많이 늘릴 수가 없어 아쉽게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정신없이 둘러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 벌써 점심때가 지났다. 어쩐지 배가 고프다 싶었지. 찬찬히 구경하는 데만 세네 시간 정도 걸릴 정도로 규모도 크고, 이것저것 구경할 거리가 많았던 산 텔모. 돌아오는 나의 손엔 남미의 유명한 디저트 중 하나인 둘세 데 레체(Dulce de Leche; 우유로 만든 캐러멜)가 들려 있었다. 짐을 늘릴 수 없어 먹으면 없어지고 말 음식을 산 게 스스로 참 잘한 일이라 여겨졌다.
'빵을 사다가 꾸덕꾸덕 발라 먹어야지-'
신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에 맞춘 듯 손에 들린 봉지가 달랑달랑 춤을 춘다.
일요일의 느지막한 오후,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라 보카(La Boca) 지구의 카미니토(Caminito)에 다녀오기로 했다. 카미니토는 라 보카 지구 안에 있는 작은 거리인데 이탈리아 하층민 이민자들이 초기에 정착해 각자의 기호에 맞게 자신의 집을 칠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지금의 알록달록 원색의 거리를 형성하게 됐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 창밖을 내다보니 길거리의 상점들은 벌써 문을 닫는 분위기다. 아무래도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이다 보니 일찍 문을 닫는 듯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오늘 밖에는 기회가 없는데…. 걱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지만 도착해 보니 다행히도 카미니토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도 유명 관광지는 빗겨 간 모양이다.
잔뜩 기대를 품고 찾은 카미니토는 북반구의 알알이 빛나는 전구 장식을 휘감은 트리나 나팔 부는 아기천사, 배 볼록이 산타 할아버지의 장식물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만약 있다 해도 어울리기보단 이질적이었을 거였다. 대신 카미니토는 다양한 색깔로 칠해진 건물들이 크리스마스 전구 대신 한낮의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생소한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사람들은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고 예쁜 거리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는 데 여념이 없고, 거리에서는 크리스마스 치고는 더운 한여름의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1년에 한 번 있는 어느 인기 있는 공휴일이라기보단, 여느 일요일과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파티엔 각자 마실 술만 준비해 가면 되었다. 파티 시작 전,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근처 마트에 들러 맥주 몇 캔을 사들고 남사의 3층 테라스로 올라갔다. 딱 맞춰 올라간 줄 알았더니 이미 분위기가 한창이다. 익숙한 얼굴들 틈에 자리를 잡고 앉자 오늘 새로 들어온 뉴페이스들도 듬성듬성 보인다.
사장님은 한편에서 고기와 쵸리소(Chorizo; 소시지)를 열심히 굽고 계시고 불판에선 맛있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계속해서 불판에 올려지는 고기는 다 구워지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접시 위에 고기는 배가 고픈 사람들의 재빠른 젓가락질에 하나둘 희생되어 갔다.
뽁- 술병을 따자 본격적으로 파티가 시작됐다. 다들 술이 들어가니 분위기가 달뜨기 시작했다.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소리가 테라스를 넘어 골목길로 울려 퍼졌다. 어느 즐거운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이었다.
술과 고기로 이미 부른 배를 더욱 가득 채우느라 배에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다들 마찬가지였는지 테이블 위의 몇 점 남지 않은 고기는 식어 빠지고, 술이 사라지는 속도 또한 점점 줄어들 즈음이었다. 사장님의 호령에 다 함께 푸에르토 마데로(Puerto Madero)에서 예정되어 있는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남사를 나섰다.
걸어가도 충분한 거리였기에 사람들과 시끄러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십 분쯤 걸었을까. 항구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낸다. 12시가 가까워졌다. 어디서 불꽃이 터질지 알 수 없어 방황하다 보니 어디선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엇, 열두 시 아직 안 됐는데.'
멀리 보이는 불꽃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열두 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불꽃이 다리 위로, 물 위로 쏘아 올려졌다. 사방에서 터지는 불꽃에 발걸음을 멈춘 후 하늘을 올려다봤다.
"메리 크리스마스!"
다 함께 허공에 대고 외쳤다. 묘해진 기분으로 까만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올려다보길 몇 분 후, 화려했던 불꽃은 아스라지는 잔해를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기대했던 것보다 불꽃놀이는 훨씬 소박했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어둠이 내려앉은 새까만 거리를 걷다 다 함께 올해의 새로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아름다웠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하기에는 충분히 차고 넘쳤다.
크리스마스 당일, 전 날 아사도 파티의 여파로 사람들은 오후 내내 각자의 방에서 자거나, 쉬거나 했다. 어느 주말의 한가로운 풍경 같았다. 저녁때가 다 되어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거리로 나서니 온 세상이 조용했다. 떠나야만 하는 아쉬움을 남사에 남겨둔 채 문을 꼭꼭 닫으려는데 바둑이가 따라 나온다.
바둑이는 놀이터를 지나 지하철역에 다다를 때까지 내 뒤를 졸졸 따라와 내 마지막을 끝까지 배웅해 줬다. 계단을 내려서서 아직 떠나지 않고 나를 지켜보는 바둑이를 돌아보며 인사했다.
"마중해줘서 고마워, 바둑아."
다들 걱정할 테니 빨리 들어가라고 손을 휘휘 저어주고선 지하철 역에 들어섰다. 바둑이조차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됐다. 팽팽했던 끈이 탁 풀리듯 아쉬움이 몰려왔다. 남사에 꽁꽁 묶어두고 떠나려 했던 아쉬움을 바둑이가 끌고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역사에 들어오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어려울 것은 없었지만 혼자이다 보니 제대로 가고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을 하게 됐다. 버스 터미널이 있는 레티로(Retiro) 역에 도착하니 버스가 출발하기까지 삼십 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장거리 이동을 대비해 생수를 한 통 사들고 전광판 앞에 서서 플랫폼 정보가 나타나길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전광판에 나타나지 않는다. 당혹스러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누군가에게 확실하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흔한 역무원조차 눈에 띄질 않았다. 출발 시각이 점점 더 가까워오자 이대로는 안될 것 같은 마음에 급히 지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손짓 발짓으로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모른다며 고개만 저어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삼십 분 일찍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랫폼이 수십 개에 달할 정도로 워낙 넓은 터미널 탓에 여유 부릴 틈 따위는 없었다. 당장 눈에 띄는 것만 보아도 플랫폼 개수가 50개도 넘어 보였기에, 직접 돌아다니며 훑어보기는 불가능했다. 이 넓은 터미널에서 놀란 토끼마냥 방황하고 있는 것은 나 혼자였다.
다행히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마지막으로 도움을 청했던 분이 내 버스표를 살펴보더니 손가락으로 방향을 알려 주어서 출발 2분 전 무사히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내미는 버스표를 보는 시늉이라도 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우습게도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버스 놓치는 게 뭐가 대수라고. 하지만 정작 무서웠던 건 결국 버스를 놓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급하게 도움을 청했을 때 단번에 무시해버리던 사람들의 차가운 눈빛이었다. 여행길 위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라 여겼던 내 막연하고 안일한 믿음에 의구심이 들던 순간이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자리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약해지지 말자. 어떤 일이든 해결은 될 테니. 창밖을 지나는 도시의 풍경이 말없이 나를 위로해주는 듯했다. 지나고 나면 다 별것 아니야.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거나 걱정에 발을 동동 구를 필요는 없어….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Tip>
*라 보카 지구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카미니토 지역을 제외하고는 위험하기 때문에 택시로 이동하는 게 낫다. 도착해서도 그 주변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자.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레티로(Retiro) 역은 1000개가 넘는 행선지로 향하는 112개의 버스 회사에서 운영하는 버스들이 오고 가는 곳이니만큼 플랫폼 수만 75개에 달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를 충분히 두고 터미널 도착하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