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도시
푸에르토 이과수(Puerto Iguazú)에서 장장 스무 시간을 달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에 도착했다. 전날 해질 무렵에 버스에 올랐는데 버스에서 내리니 벌건 대낮이다. 좁은 좌석에 꾸깃꾸깃 구겨 넣어 찌뿌둥해진 몸을 펴고 남미의 유명한 한인 민박, '남미 사랑'으로 향했다.
"띵동-"
남미 여행의 첫 한인 민박이다.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벨을 누르자 매니저님이 나와 문을 열어주시고, 뒤이어 남미 사랑의 마스코트 바둑이가 꼬리를 흔들며 따라 나온다. 낯선 손님이 들어오자 펄쩍펄쩍 주변을 뛰어다니며 짖어대는 바둑이가 정겹다. 매니저님과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는 것에도 괜스레 안정감이 들었다.
'여기가 남미 사랑이구나.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가기 어렵다는 블랙홀 같은 곳.'
짐을 내리고 숙소를 한 바퀴 휘 돌아봤다. 여행자들은 이미 한창 밖에 나가 있을 시각이라 숙소는 조용했다. 1층과 2층엔 깨끗한 침대가 놓인 방들이 있고, 3층엔 주방과 식사 겸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용 공간이 있다. 매니저님을 졸졸 따라 숙소를 구경하는데,
"아침은 한식이고, 김치랑 밥은 언제든 양껏 꺼내 먹어도 돼."
벌써부터 떠나고 싶지 않아 졌다.
숙소에서 만난 언니들과 오후 일정을 함께 하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시원하게 쭉 뻗은 '7월 9일 대로(Ave. 9 de Julio)'를 달렸다. '남미의 파리'라는 별칭에 걸맞게 화려한 건축 양식을 한 건물들이 길을 따라 줄지어 서있다. 목적지는 '엘 아테네오(El Ateneo)' 서점이다.
엘 아테네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유명하다. 이 곳은 관광 책에도 버젓이 실려있을 만큼 이 도시를 방문한 여행자들이라면 꼭 들러야 하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조금은 의아했던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깊숙이 뻗어나가는 우아한 외양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와… 이게 서점이라고?'
엘 아테네오 서점은 과거 오페라 극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개조해 만들었다고 한다. 극장의 큰 틀은 유지하며 서점으로 사용하기 위해 예전에 공연이 펼쳐졌을 무대 위에는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카페가 들어서 있고, 관객석이 있던 자리에는 책장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책장 사이에도 듬성듬성 소파들이 놓였다.
읽을 수도 없는 책들을 이리저리 뒤적여 보다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 커피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자리를 잡고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들, 책장을 훑어보고 책을 뒤적이는 사람들, 음반을 살펴보는 사람들…. 조용하지만 참 활기찬 풍경이었다.
계단을 올라 3층에 올라서면 서점의 전체적인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높은 천장에는 노란 톤의 벽화가 그려져 있고, 노란빛의 조명이 서점을 밝히고 있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분위기다. 가만히 보니 상류층 사람들이 공연을 즐겼을 2, 3층의 테라스에도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소파가 놓여 있다. 스페인어 책을 읽을 줄만 알았더라면 여유롭게 커피 한 잔 하며 긴 시간을 보내도 좋았을 곳이었다.
남사 매니저님의 추천으로 매일 다른 공연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한 '노토리우스 재즈 클럽(Notorious Jazz Club)'을 찾았다. 공연장은 작았다. 테이블이 무대 앞에서부터 3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무대라 할만한 단상조차 눈에 띄지 않았고, 바닥의 연장선 위에 마이크며, 피아노며, 드럼 등의 악기가 놓여 있다. 소규모의 프라이빗한 공연을 보러 온 듯한 느낌이었다.
공연 시작 전, 분위기를 낸다고 함께 있던 언니들과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곧이어 안내자의 멘트가 이어지고, 공연이 시작됐다. 공연은 중간에 잠깐의 쉬는 시간을 가지고 두 시간가량 이어졌다. 곡도, 네 명이 합을 맞춘 연주도 기대 이상으로 너무 좋았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눈을 지그시 감고 음악에 취한 듯 드럼을 치던 한 연주자님이었다.
공연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공연장에 다른 사람은 모두 지워지고 오로지 그 분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한창 좋아하는 일에 대한 고민이 많던 차라 가슴에 더 묵직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멋졌다. 그분의 지긋한 표정과 진지한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내게 진한 잔상을 남겼다.
너무 큰 감명을 받아 연주가 끝나고서도 그분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기에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어떻게든 감명받은 내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마무리 멘트가 이어지고, 공연장을 울리는 박수소리를 끝으로 공연은 끝이 났다.
사람들은 무대를 향해 있던 몸을 돌려 앉아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이어나간다. 금세 공연장은 웅성거리는 대화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나도 돌아 앉아 남은 와인을 비우며 대화에 집중하려는 그때, 연주자님께서 우리 테이블로 오셨다. 연주자님은 감사하게도 포스터도 선물로 주시고, 잠깐이나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너무 영광스러웠다. 덕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시작이 따뜻했다.
탱고의 발상지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매일같이 탱고 공연이 열린다. 그중 한국인 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탱고 공연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뽀르떼뇨(Porteño), 소규모의 꼼쁠레호(Complejo), 그리고 그 중간 정도 규모의 삐아졸라(Piazzolla)가 있다.
혹여나 예산이 부족하다 해도 쉬이 탱고 공연을 볼 수가 있는데, 산텔모나 플로리다 거리와 같은 길거리에서 무료 탱고 공연이 종종 펼쳐지기 때문이다. 나는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연장에서 하는 탱고 공연을 꼭 보고 싶었고, 일행들과 함께 삐아졸라 탱고를 보러 가기로 했다.
공연 날, 공연장에 들어서니 붉은 커튼이 쳐진 무대 아래 식사가 포함된 티켓을 구입한 관객들이 먼저 와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공연장은 기품 있었다. 전체적으로 흰 톤의 공연장에 붉은빛과 금빛의 우아한 문양으로 장식을 둘렀다. 공연장을 보고 나니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마구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공연장에 어둠이 내려앉고 핀 조명이 켜지며 공연이 시작됐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화려한 옷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한 댄서들이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음악에 꼭 맞춘 듯 딱딱 맞아떨어지는 움직임과 빠른 발놀림, 매끄러운 턴…. 그중에서도 특히나 나를 사로잡았던 건 댄서들의 감정이 절제된 표정이었다. 마치 오래전 유럽에서 넘어온 이민자들의 향수 어린 눈빛을 이 순간 직접 마주하는 듯했다.
탱고는 한 시간 반 동안 내 혼을 쏙 빼놓았다. 댄서들의 격정적이면서도 절제된 몸놀림과 삶의 애환이 담긴 눈빛, 반도네온의 절절한 울음소리가 가슴에 멍울졌다. 탱고는 살아있는 예술이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남미의 문화 예술의 중심지라는 별칭에 걸맞게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언제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올리면 정열의 탱고와 길거리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길거리 공연들, 수준 높은 미술관과 박물관들, 도처에 널린 서점과 동네 헌책방들이 자연스레 생각난다.
뿐만 아니라,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걷고 싶은 거리가 가득한 곳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지도를 구태여 꺼내어 들 필요가 없다. 발길이 가 닿는 모든 곳이 충분히 아름답기 때문이다.
해질 무렵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정처 없이 걸었던 지난 어느 날이 생각난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그림자가 옮겨갈 때까지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던 그 날. 길을 걷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어느 광장에서 어린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상하게도 그날의 그 풍경이 다른 여타 유명한 관광지보다 유독 잔상이 붉게 남았다.
나에게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길을 잃어도 좋은 곳. 오히려 길을 잃었을 때 만나게 될 풍경이 더욱 궁금해지는 곳. 그 누가 이 도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Tip>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탱고의 도시답게 탱고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아주 많다. 무료로 탱고 레슨을 해 주는 교습소들도 있고, 국립 아카데미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탱고 레슨을 받을 수 있다. 또, 탱고를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밀롱가'에 가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탱고를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