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2017년 12월 18일. 예정 대로라면 푸에르토 이과수(Puerto Iguazú)를 떠나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에서 푹 쉬고 있었어야 하는 날이었다. 남미의 유명한 한인 민박인 '남미 사랑'에서 제대로 된 한식도 먹을 예정이었다. '예정 대로라면' 그랬다는 거다. 하필이면 이 날, 아르헨티나에서 총파업이 일어날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 여파로 아르헨티나 내의 모든 운송 편이 취소되었다.
확인해 보니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넘어가기 위해 미리 싼 가격에 예약해 뒀던 항공편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호스텔에 1박 더 머무르며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고, 상황을 제대로 아는 이도 없는 듯했다. 남미 사랑 단톡방도 어수선했다. 이동 예정이었던 여행자들은 모두 발이 묶인 듯했다. 호스텔 직원에게 물어봤지만 아마 비행기는 뜨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보다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우선 공항에 가 보려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혹시나 상황을 알까 싶어 터미널 창구에 물었다.
"혹시 오늘 파업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비행기를 예매해 뒀는데 공항에 가는 게 소용 있을까."
"아냐.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어."
"그럼 비행기가 오늘 뜬다는 거야? 그렇지만 여기 항공사 홈페이지에 공지를 보면…."
"공항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갈 거야, 말 거야? 12시 버스야."
창구에 앉아있던 직원은 내 말을 끊으며 같은 말만 반복한다. 어떻게든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질문을 해도 답변은커녕 굉장히 귀찮다는 태도로 자기 할 말만 하는 직원을 보고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공지에 따르면 오후 12시부터 파업이 시작되기 때문에 공항까지 간다 한들 공항 창구가 열려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하루쯤. 하루쯤 늦춰진다 해서 일정에 큰 차질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공항에 가봤자 어쩌지 못하는 건 같을 테니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루 정도 쉬면서 여독이라도 풀면 좋았을 텐데 숙소가 너무 더워서 그럴 수조차 없었다. 방 에어컨이 오후 8시부터 나온다나….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움직이기는커녕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눅눅한 습기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힌다. 최대한 팔다리를 떨어뜨려 공기를 통하게 하고 꼬박 하루를 버텼다. 하루 종일 한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피곤함이 가시질 않는 건 분명 더위 때문일 거다.
다음 날 아침, 오후부터는 비행기 운행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부랴부랴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은 북새통이다. 체크인 카운터에서부터 이어진 줄은 공항 입구까지 거대한 똬리를 틀었다. 한참을 기다려서 카운터에 갔더니 비행기는 풀북이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물으니 항공사 직원은 제대로 된 대처를 전혀 해주지 못했다.
"아니, 그렇지만…. 비행기 변경도 안 돼?"
"응. 취소하고 새로 예약해야 해."
직원은 전액 환불해 줄 테니 메일을 보내라며 메일 주소가 적힌 쪽지를 달랑 건넨다. 나는 종이쪽지 하나 덜렁 손에 든 채 뒤로 물러나 19일 자 비행기를 예약해 놓은 사람들, 남는 자리를 선착순으로 선점한 사람들이 수속을 밟는 모습을 망연히 지켜봐야만 했다.
'일처리가 엉망이구나. 한국이었다면 이러진 않았을 테지. 이런 대처라면 난리가 나도 한참 났을 거야.'
이런 일이 있다면 제대로 된 대처법을 알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항공사에서는 비행 편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메일로나마 알려주지 않았고, 홈페이지엔 "파업한다”는 공지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대처법도 나와 있지 않았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호스텔 직원에게 (받지도 않는) 콜센터로 전화를 부탁하는 것과 구글 번역기를 돌려 가며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떤들 아쉬운 쪽은 내 쪽이었다. 여기는 내 나라 한국이 아니라, 아르헨티나였으니까. 유창한 스페인어로 말싸움할 자신도 없었고, 그렇다고 바뀌는 게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엔 다시 시내로 되돌아와 20시간이 넘는 버스 티켓을 사게 됐다. 심지어 비행기표와 가격도 거의 같았다. 허탈했다. 미리 끊어둔 비행기 표 때문에 브라질의 일정을 더 늘리지도 못했는데, 결국 그 비행기는 타지도 못하게 되다니. 아, 나는 무엇을 위해 비행기 표를 미리 끊어 뒀나.
물론 답답하고 화가 났지만 다 참을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감내하지 못했을 상황도 둘이니 나았다. 하필 18일 자에 비행기를 끊어 이 모든 사태를 감당해야 했지만 다 좋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릴없는 이과수에서의 일정을 하루 더 늘리게 됐고 아침부터 낑낑대며 힘들게 싼 짐을 도로 풀어야 했으며,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숙소에서 가만있어도 땀이 뻘뻘 나는 날씨를 견뎌야 했지만. 심지어는 비행기로 2시간 만에 갈 거리를 버스로, 그것도 같은 가격에 20시간을 가야 했지만 이것도 다 경험이려니 좋게 생각하려 했다.
슈퍼마켓에서 곧 있을 장거리 버스를 대비해 간식거리를 사려던 중이었다. 문득, 버스는 추울 테니 패딩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 패딩이 내게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보조 배낭 옆에 달아 두었었는데…. 다급히 손을 뒤로 뻗었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고 기억을 되짚어봐도 생각나는 게 없다. 아무래도 길이나 버스에서 흘린 게 틀림없었다.
그 순간 모든 게 참을 수 없어졌다. 내게 벌어진 믿기지 않는 일들도 욕 한 번 하고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마음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주마등처럼 여행을 준비하던 지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여행 준비를 하는 데만 돈 깨나 들었는데, 내 부주의로 인해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물건을 잃어버렸구나. 엄마와 함께 준비물을 사러 다녔던 지난날들이 떠오르면서 엄마에게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집을 나선 후 처음으로 집에 가고 싶어 졌다.
무거운 배낭과 온몸에 줄줄 흐르는 땀과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들이 무방비상태였던 내 몸을 순식간에 덮쳐 왔다. 어떻게 잘 막고 있던 감정의 마개가 튀어나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막을 새도 없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고, 그것들은 눈물이 되어 흘렀다. 펑펑 울고 싶었지만 같이 있던 동행의 기분마저 망치고 싶지 않아 그럴 수조차 없었다. 터질 것 같은 울음을 몰래 삼켰다. 자꾸만 주저앉고 싶어 졌다.
먹먹한 마음을 꾹 누르며 버스에 올랐다. 한숨부터 나온다. 버스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 아니, 나쁘다. 그 좋던 브라질 버스와 비교 대상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좌석 시트가 더러워 눈을 딱 감고 자리에 앉아야 했다. 의자 간 간격이 좁아 다리를 편히 둘 수도 없다. 옆을 보니 창문에 쳐진 커튼엔 곰팡이가 폈다. 윽. 집게손가락으로 커튼을 집어 최대한 멀리 걷어냈다. 하지만 그보다 가장 큰 문제는,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다.
창문을 열어도 눅눅한 공기에 온 몸이 꿉꿉해졌다. 땀띠가 생길 것만 같았다. 설상가상, 앞자리에는 민폐 커플이 앉았다. 좌석을 뒤로 한껏 젖힌다. 뒷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젖혀진 좌석 너머로 그들의 애정 행각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눈 뜨고 못 봐줄 광경이었다. 목청도 어찌나 좋은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줄 알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고? 도대체 누가 그랬어? 도저히 즐기려야 즐길 수가 없다. 그럴 수 없는 상황들의 연속이다. '즐기긴 개뿔-'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다시금 참을 인을 가슴 깊숙이 새겨야 할 때였다.
버스에서 맞이하는 아침. 당연하게도 더위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생각보다 장거리 이동 시에 할 수 있는 건 많지가 않다. 잠을 자거나, 노래를 듣거나, 사진 정리를 하거나.(누군가는 책을 읽는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 조차도 스무 시간이 넘어가면 마땅히 할 게 없어지는 건 당연지사다. 어느 순간 잠도 오지 않으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논리도 맥락도 없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스무 시간을 꼬박 보낸 그 버스에서의 최악이었던 점은 수도 없이 꼽을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좋았던 점이 있다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밀려오는 생각들을 몇 번이고 곱씹어 볼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이리저리 떠오르는 생각들을 구태여 막을 필요도 없으니, 남는 시간은 생각을 정리하는 데 쓸 수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장기 여행을 이어나가다 보면 끊임없이 짐을 싸고 풀기를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지치기 마련이다. 몸이 힘들면 머리는 생각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각 잡고 앉아 생각할 시간을 마련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간이 강제적으로나마 주어진다는 건 지나온 여행길을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곤 한다.
지난 이틀간 일어났던 일을 되짚어 봤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지만 나는 예정대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고 있다. 뭐가 됐든, 어떻게든 결국 해결은 된다. 또, 몸과 마음이 지쳐 있어 작은 일에도 크게 속이 상했었다. 하지만 주저앉고 싶은 힘든 시간들 조차 다신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들이다. 나중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그리울까.
여행에서의 하루는 일상에서의 수십일과 같다. 온통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느라 모든 오감은 열리고 내내 정신이 없다. 그래서 평소보다 감정의 반경이 크고, 그 색채가 짙다. 모든 감정이 배는 증폭되어 기쁨은 더 큰 기쁨이 되고, 슬픔은 더 큰 슬픔이 된다. 어쩌면 별일 아닌 일에 무너지기도 하겠지만 이 또한 여행이 갖는 힘이니, 이조차 사랑해 보기로 한다.
과연 이번 여행은 내게 어떤 것들을 남길까. 궁금해졌다.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Tip>
*앞서 언급했다시피, 푸에르토 이과수-부에노스 아이레스 구간은 비행기로 두 시간, 버스로 스무 시간 이상이 걸리는 구간이다. 미리 예약한다면 비행기와 버스 값에 별 차이가 없으니 일정이 정해지는 대로 비행기 표를 예매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