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 마을로부터
6시 반, 새벽 탁발을 보기 위해 이른 기상을 감행했다. 대충 눈곱만 떼고 졸린 눈을 비비며 방갈로의 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볼을 스치며 아직 달아나지 않은 잠을 대신 쫓아내 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둘러본 새벽의 므앙 응오이는 온통 뿌연 빛이다. 남우 강에서 올라온 물안개가 마을 전체를 뒤덮고, 산 꼭대기마저 안개에 가려 있다. 아직 동트지 않은 새벽의 므앙 응오이는 아직 몽롱한 잠에 취해 있었다.
탁발은 불교 국가인 라오스에서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행해지는 종교의식으로, 수행자(스님)들이 남에게서 음식을 빌어먹는 행위를 말한다. 므앙 응오이의 탁발은 아침 여섯 시 반 경, 11명 정도의 어린 스님들이 마을에 하나 있는 작은 사원에서부터 시작해 500m 남짓한 길을 따라 걸으며 진행된다.
탁발은 수행자의 자만과 아집을 버리게 하고, 무소유의 원칙에 따라 끼니를 해결하는 것조차 남의 자비에 의존하는 수행 방식이다. 석가모니가 불교를 창시한 이후 승려들이 생활을 유지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었으며, 태국이나 미얀마 등지의 상좌부 불교에서는 승려들이 여전히 이 탁발 행위를 많이 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스님들이 지나갈 길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지내게 해 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스님들이 차례차례 탁발을 행하며 다가오면 쌀밥을 드리고, 스님들이 지나간 길 위로 물을 한 컵 뿌린 뒤 자리에서 일어선다. 바닥에 물을 뿌리는 것은 '어제의 내 죄를 씻어내 달라'는 뜻이다.
탁발이 끝나고 나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매일마다 조를 짜서 돌아가며 반찬을 가지고 사원에 따라가 스님들의 식사를 돕는다. 이처럼 매일같이 행해지는 탁발과 주민들의 마음 씀씀이에서 불교가 라오스 인들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약속한 시각에 큰길에서 김 선생님을 만났다. 오늘 함께 반나(Ban Na) 마을에 다녀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홈판'도 함께 가기로 했다. 홈판은 므앙 응오이의 현지 주민이다. 넷이 함께 마을을 벗어나 오른편으로는 강을 끼고 흙먼지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으로부터 라오스의 이런저런 역사 이야기와 마을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보니 금세 탐깡(Tham Kang) 동굴이다. 탐깡 동굴은 인도차이나 전쟁 때 마을 주민들이 폭격을 피해 숨어 살던 곳으로, 낮이면 군인들의 눈을 피해 나와서 일을 했던 곳이다. 잠깐 들어갔다 나왔는데 안이 너무 어두워 더 깊숙이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제껏 걸어온 만큼만 더 가면 반나 마을이다. 중간에 갈림길이 나오는데 하나는 지름길, 하나는 정석으로 가는 길이란다. 이곳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홈판과 선생님 덕분에 우리는 자연히 지름길로 접어들었고, 맨발로 얕은 냇물을 건너고 논길을 지났다.
누런 소들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자유로이 풀을 뜯는다. 카르스트 지형에 둘러싸인 한적한 농촌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람이 드나들어 자연스레 수풀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드디어 저 멀리 마을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나 마을은 므앙 응오이에서 꼬박 1시간 삼십여 분을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곳으로, 므앙 응오이보다 오지에 있는, 교통이 굉장히 불편하고 시설이 열악한 곳이다. 요즘 들어 어찌 알았는지 이 곳을 찾는 외국인 여행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선지 반나 마을 초입에는 게스트하우스가 떡하니 자리 잡고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선생님께선 커피 한 잔 하자며 익숙한 듯 어느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세 자매가 사는 안락한 집이었다. 벽에는 한글이 또박또박 적힌 종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선생님이 커피를 부탁하자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첫째 '쑥'이 당연하게 커피를 낸다. 이 곳은 어린아이들도 일을 하는 것이 익숙하고, 당연하다.(여기선 15세가 되면 성인이라 결혼도, 술 담배도 가능하다.)
달디 단 라오스 커피를 한 잔 하고 우리는 마을의 개울가로 내려갔다. 이 곳은 마을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다. 여기서 목욕도, 빨래도, 설거지도 한다. 개울가에선 여자아이 몇이 목욕할 때 입는 치마 같은 것을 몸에 두르고 목욕을 하고 있고, 멀리 반대편에선 남자아이가 조그만 아기를 씻기고 있다. 한쪽에선 소가 내려와 목을 축이고 오리가 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 진귀한 풍경이었다.
이곳 반나 마을엔 전기가 없다. 대신 자체 수력 발전기를 개울에 설치하고, 밤이 되면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공급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모든 가구가 가진 것이 아니라, 게 중에서도 '좀 사는 집'에서만 발전기를 돌리고 있다. 그래서 밤이 되면 몇십 명의 아이들이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 한 데 모여 다 함께 텔레비전을 본다고 한다.
이 곳엔 병원도 없다. 누군가 아프면 그나마 제일 가까운(걸어서 한 시간 반이 걸리는) 므앙 응오이로 나가야 하고, 큰 병원에 가려면 배를 타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쑥이 열매를 따려다 나무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을 때, 병원도, 치료비도 없어서 약 삼 주를 저절로 뼈가 붙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는 가슴 아픈 일화도 있다.
어쩌면 반나 마을은 우리나라의 60-70년대의 모습과 비슷할지 모른다. 누구네 집 할 것 없이 동네 아이들이 한 데 모여 다 함께 놀고, 자기 동생 할 것 없이 서로를 챙기고, 밥때가 되면 누구든 자연스레 밥을 챙겨 먹인다. 하루 종일 밖에서 뒹굴어 꼬질 해진 몸을 강물에 씻겨 내고, 밤이 되면 한 데 모여 텔레비전을 본다.
마을엔 울타리도, 담벼락도 없다. 심지어는 집집마다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누구든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듯이. 반나 마을은 내 어린 시절과 맞닿아 있지 않지만 괜스레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마을 중심에 있는 식료품을 파는 집에 잠깐 궁둥이를 붙였다. 문을 활짝 열어 놓아 바람이 시원하게 통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우리는 홈판과 개구쟁이 남자아이들 여섯, 여자아이 둘, 그리고 마을의 중학교 선생님과 함께 작살 낚시를 하러 가기로 했다.
땡볕에 아이들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도착이다. 아이들은 익숙한 듯이 물안경을 차고 작살을 들고 물에 첨벙첨벙 입수한다. 물고기를 찾으려 고개를 얕은 물속에 처박으니 궁둥이만 뒤로 쭉 뺀 모양새다. 엉금엉금 귀여운 몸짓에 물고기를 잡을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꼿'이 허리에 차고 있던 조그만 나무 바구니에 순식간에 물고기가 그득그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몇 분을 지켜보다 동생이 먼저, 그다음 내가 차례로 작살을 들었다. 아이들과 똑같이 물안경을 차고 얼굴을 물속에 집어넣었는데 대체 물고기가 어디에 있다는 건지, 아이들 눈엔 잘만 보이는 물고기들이 도통 보이질 않는다. 아이들이 손을 잡고 이끌어줘서 물고기를 겨우 보긴 봤지만, 작살은 번번이 명중 실패였다.(결국 동생과 나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얕은 물길을 계속해서 거슬러 오르자 이윽고 작은 폭포가 나타났다. 이제 작살 낚시는 끝이 났다. 지쳐버린 나는 물 맡으로 걸어 나왔고,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웃통을 벗고 폭포수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즐긴다. 바닥에 주저앉아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 곳 아이들에게 낚시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생업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귀여워만 보였던 어린아이들의 작은 몸집에서 단단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저마다 등에 지고 있을 삶의 무게가 짐작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인 건지, 첨벙첨벙 뛰놀고 장난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그들의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했다.
아이들은 잡은 물고기를 꼬챙이에 꽂아 모닥불에 굽고, 물고기를 넣은 수프 요리를 뚝딱뚝딱 만들어 낸다. 여자아이들은 면요리를 만들고, 그릇과 수저 등을 챙겼다. 어디에선가 따 온 바나나 잎을 깐 자리가 그럴싸한 식탁이 되었다. 홈판은 이름 모를 풀들을 두 손 잔뜩 뜯어 돌아왔다.
다 함께 동그랗게 자리에 둘러앉았다. 밥과 면요리, 물고기 수프, 야채 따위가 밥상에 올랐다. 찹쌀밥을 손가락으로 굴려 금방 잡은 물고기로 만든 요리를 곁들여 먹었다.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 아이들 덕분에 접시는 순식간에 비워졌고, 그런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왔다.
직접 잡은 물고기로 꾸린 점심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사용한 수저와 젓가락 등을 흐르는 강물에 씻고 쓰레기를 챙겨 길을 나섰다. 여전히 내리쬐는 햇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반나 마을로 돌아가는 길.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이 마을과 아이들에게 정이 가고 있었다.
마을에 거의 다 와갈 시점, 아이들이 뒤에서 무언갈 굴리면서 시끄럽게 달려왔다. 기다란 막대기의 끝에 바퀴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아이들 나름대로 장난감을 만든 것인데, 나무의 열매를 따서 나뭇가지에 꽂아 바퀴를 만든 것이었다.
이 동네 아이들은 천지에 널린 것들로 밥을 지어먹고 장난감을 만든다. 마음이 찡했다가도 찡했다는 사실이 이내 미안해졌다. 아이들의 얼굴에 걸려 있는 미소를 본다면 이 아이들이 충만하게 행복하다는 사실을 반박할 이는 그 누구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위에 지쳐 마을 중심의 식료품 집 거실에 앉아 쉬고 있으니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돌아가신 분을 위한 관을 짜는 것을 돕고, 막 시신을 안치하고 오는 길이란다.(잘 알고 지냈던 분의 부고 소식을 듣고 반나에 온 것이었다.) 반나 마을에선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다 함께 관을 짜고 시신을 안치한 뒤 태워 보낸다고 한다.
돌아가신 분은 원래 심장에 지병이 있었는데 병원에 갈 돈이 없어 방치한 채 지내오다가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과 오토바이를 타고 농키아우를 거쳐 멀리 큰 병원까지 나갔지만 결국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그 뒤 남편은 아내의 시신을 자신의 허리에 묶어 오토바이에 태운 채 마을로 돌아온 것이었다.
어두운 마을 분위기를 예상했건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이 곳의 장례식 풍습은 마치 잔치를 연 것처럼 마을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웃고 떠들고 즐기며 떠난 사람을 보내주는 것이다. 오늘 하루는 아무도 자지 않고 밤새 술을 진탕 마시고 먹을 예정이라 했다.
장례를 치른 뒤에는 함께 시신을 태우고 마지막엔 축포를 터뜨린다. 어쩌면 죽음은 무섭고, 두렵고, 무거워야만 할 것이 아니라는 듯이. 죽음은 탄생만큼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흐르는 물처럼 오고 가는. 그것을 여기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해가 지기 전 마을 뒤에 있는 언덕에 올랐다. 해가 차츰 기우는 것을 보니, 마을 사람들과 작별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멀리 보이는 들판엔 여전히 소들이 자유로이 풀을 뜯고 있다.
돌아가기 전, 아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마을의 학교로 향했다. 나무로 만든 투박한 골대가 기우뚱 서 있는 작은 운동장에서 남자아이들이 한 데 모여 축구를 하는 중이었다. 축구공은 이전에 다녀간 한 여행객이 선물로 줬다고 했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노는 모습을 지켜보다 므앙 응오이로 돌아가기 위해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작별이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간 므앙 응오이에 가기도 전에 해가 땅에 떨어질 것이었다.
"안녕, 얘들아. 잘 있어. 또 올게. 약속해."
기약 없는 약속을 남긴 채 뒤돌아섰다.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귓바퀴 너머로 멀어져 갔다.
황금빛으로 물든 논밭은 찬란하기 그지없었다. 이 곳이 많이 생각나겠지. 이 곳 사람들의 사는 방식과 순수한 눈망울을 지닌 아이들이.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던 사람들의 따스한 눈빛들이. 한없이 아쉬웠지만 또 한없이 벅차올랐다. 타들어갈 듯 붉어지는 노을과 함께 황홀경에 젖어들었다.
이 곳의 순수한 아이들을 다시 만날 날이 금세 오기를...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Tip>
*반나 마을은 개별적으로 다녀올 수도 있고, 므앙 응오이에서 트레킹 투어를 신청하여 다녀올 수도 있다. 홈스테이를 하는 1박 2일 투어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