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바스코의 타피훌라파에서
타피훌라파는 멕시코 타바스코 주의 유일한 마법의 마을로, 타바스코 주의 산에 위치한 마을이다.(현재는 2023년 7월을 기준으로 3개로 늘었다.) 타바스코 주는 멕시코 대륙의 등허리에 위치한 곳인데, 타피훌라파는 그중에서도 안쪽, 내륙 지방이다 보니 이동도 쉽지 않았다. 타바스코 주의 수도인 '비야에르모사(Villahermosa)'에서조차 바로 가는 버스가 없어 '타코탈파'라는 근처 마을로 이동한 후 콤비로 갈아타고 산길을 달려 더욱 깊숙이 들어가야 했다.
만원의 콤비 안에서 좌우로 이리저리 흔들려가며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달리고 달려왔건만. 첫인상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이때까지 다녀온 마을들 중 규모가 가장 작고, 여행객이 갈만한 숙박 시설이나 레스토랑과 같은 부대시설이 제일 부족했다. 인프라가 열악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구글 맵을 켰을 때 선택지가 식당은 5개가, 카페는 3개가 채 되지 않았다.(실제로 우리는 머무는 동안 카페 2곳, 식당 2곳을 번갈아가며 방문했다.) 설상가상으로 고픈 배를 간단히 채울 만한 길거리의 흔한 노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방문객이 많이 없는 곳임이 틀림없었다.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태양이 애매하게 기운 시간, 아무도 없는 광장 벤치에 앉아서 허기를 달래줄 과자를 우적거리며 씹어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자전거 한 대가 굴러들어 오더니 우리 앞에 끼익 하고 멈춰 섰다. 모자챙 너머 곁눈질로 슬쩍 살펴보니 나이가 많아봐야 초등학생 즈음 되어 보이는 어린이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자기들끼리 뭐라 쑥덕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또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멕시코의 작은 마을을 여행할 때면 어김없이 겪었던 상황이 다시금 발생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수순은 뻔했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볼 것이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신기해할 것이고, 함께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할 것이다. 그다음은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었다. 흔쾌히 사진을 찍어 주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기분 좋게 가던 길을 가거나, 친구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인사도 없이 쌩하고 사라져 버린다거나.
나는 속으로 그들이 제발 갈 길을 가주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첫째로는 외국인이라서(정확하게는 동양인이라서) 받는 관심이 때로는 버거웠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장시간 이동으로 심신이 피곤한 상태에서 사회적 가면을 쓴 채 누군가와 대화를 이어가기 귀찮았기 때문이고, 마지막으론 간혹 예의가 없는 친구들을 겪고 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어넘겨버릴 만큼 내가 마음이 그다지 넓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주변을 눈에 띄게 서성이기 시작한 어린이 군단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써 눈을 돌리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웬걸, 적은 내부에 있었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서 음료수를 들이켜고 있던 오빠가 그들에게 ‘올라’ 하고 인사를 건넸다. 눈빛으로 쏘아 보낸 소통에 굉장한 오류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다급히 오빠의 옆구리를 푹 찔렀지만 이미 늦었다.
"!!!...... 올라!"
그들 중 한 명이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화답했다. 뒤이어 간단한 인사말이 오고 갔다. 그들은 점차 눈에 띄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 들뜨게 한 게 분명했다.
‘윽, 망했다….’
나도 이내 마음을 내려놓고 금방 대화가 마무리되길 빌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예상에 빗나간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에 대해 궁금하기는커녕 하나둘씩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는 앞구르기며 뒷구르기, 옆돌기 등을 보여주겠다며 기어이 앞다투어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똑 부러지는 말투와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척척박사 에르윈, 나이에 걸맞은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를 지닌 펠릭스, 축구와 게임을 가장 좋아하는 에너지 넘치는 헤수스,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여행객들에게 관광 가이드 일을 해주고 있다는 옥타비오까지. 그들은 기꺼이 우리의 전담 가이드가 되어 마을에서 가장 맛있는 식당과 그곳에서 꼭 맛봐야 하는 음식들을, 그리고 마을에서 꼭 가봐야 할 장소들을 추천해 주었다.
스스로가 정말 부끄러웠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럴 것이다’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벽을 치고 대했던 게 미안했다. 나는 이제껏 내가 모르는 것들을 이미 안다고 치부해 버리고 얼마나 많은 인연들을 내 손으로 돌려보냈을까. 지난날의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나. 나의 섣부른 판단이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얼마나 앗아갔을지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펠릭스는 우리가 떠나기 전날 밤, 매일 차고 있던 손때 묻은 팔찌를 풀어서 선물로 주었다. 그는 답지 않게 아무런 말도 없이 수줍게 손만 내밀었다.
“이거 우리 주는 거야? 정말 가져도 돼?”
“… 나 잊어버리지 말라고.”
그리고 머뭇대다 자신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진심이 느껴져 마음이 뭉클했다.
“에이, 당연하지! 너나 우리 잊어버리지 마.”
성큼 다가온 작별이 아쉬워 눈가가 시큼했지만 애써 숨기고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 우리는 알전구가 불을 밝힌 작고 아늑한 광장에서 마을 아이들과 마지막으로 단체 기념사진을 남겼다.
다음날 아침, 분주하게 짐을 싸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데 창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라~~~~~! 후안~~~~~~~!”
에르윈과 호세는 우리가 떠나는 날 아침, 약속한 대로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 학교에 가는 길에 우리가 머물고 있던 숙소에 들러 우리의 이름을 목청껏 불렀다. 우리는 버선발로 뛰어나가 친구들과 정말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우리 다시 꼭 올게. 그때까지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야 해.”
“응! 꼭 다시 와야 해. 약속.”
닭이 우는 소리와 함께 하루가 막 시작되던 순간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던 내 이름을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생경한 따뜻함이었다. 친구들을 학교에 보내고 뒤돌아 서자 잊고 살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마음이 금세 몽글해졌다. 핸드폰도 없었던 어린 시절 골목길에서 친구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던 그때 그 시절의 내가 좁고 긴 골목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