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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나 May 11. 2020

빨강 머리 앤처럼 다락방이 좋아요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비엔나에 있을 때, 사람들에게서 우연히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 대해서 들었다. 나에겐 이름도 생소했던 그곳은 비엔나에서 당일치기가 가능할 정도로 가깝다고 했다. 예정에는 없던 나라였지만, 여러 명의 얘기를 들으니 호기심도 생기고, 알아보니 유럽 치고 물가도 그리 비싸지 않고 해서 가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우리 가족은 3일 동안 브라티슬라바에 있었는데, 브라티슬라바 성을 하루에 보고, 다음 날 데빈 성을 보고, 하루를 올드타운을 구경하는 코스로 잡았는데 딱 적당했다. 사람들은 보통 당일치기를 한다고 하지만, 우리처럼 아기가 있는 가족이라면 며칠 있는 스케줄로 잡는 게 훨씬 낫다고 본다. 브라티슬라바 성은 정원에 있는 꽃들이 예뻐서 좋았고, 데빈 성은 브라티슬라바 성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자연과 어우러져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올드타운은 곳곳에 숨겨진 동상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의 가게들, 쿨한 카페들이 있어서 눈요기하기 좋았다.


브라티슬라바 성
데빈 성
브라티슬라바의 올드 타운


브라티슬라바가 좋았던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숙소이다.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는 원래는 수녀원인데 건물의 4층만 투숙객을 받고 있었다. 간소한 다락방에 창문이 너무 좋았다. 빨강 머리 앤의 나오는 그 다락방의 창문인 건만 같아서 도착하자마자 창문을 열고 바깥 구경을 하니 왠지 소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내가 빨강 머리 앤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냥 그 책을 읽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앤이 하는 이야기, 앤이 생각하는 것, 앤이 느끼는 감정을 읽고 있노라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는 것 같았다. 많은 걱정, 불안에 흔들렸던 대학생 시절, 난 빨강 머리 앤을 읽으며 머리를 식히고는 했다. 내가 스스로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들고, 많은 것들이 확실치 않은 때, 그냥 앞으로 다 괜찮을 거라며 다독여 주는 것 같다. 마냥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거짓된 희망을 주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마음을 잘 먹으면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상처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양보할 줄도 알았던 그 소녀를 통해서 난 위로받고 있었다. 그래서 어딜 가나 다락방을 보면 줄곧 빨강 머리 앤이 생각나곤 했다. 아직도 내 마음 한켠에 남아있는 내 안의 소녀는 주근깨 빼빼 마른 소녀 앤을 그리워한다. 빨강 머리 앤에 대한 책들이 최근에도 인기가 많은 걸 보면, 나만 그녀를 추억하는 건 아닌 듯싶다.


숙소 다락방 창문을 열고 바라 본 풍경


이 숙소에 머물면서 종종 수녀님들을 뵙곤 했는데, 마주칠 때마다 우리와 아기를 보며 정말 환하게 웃어 주셨다. 사람의 웃음과 미소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편하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걸 그분들을 보며 배웠다.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지는 못했지만, 몇 번의 마주침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삶의 만족하며 사는지 그 기운이 느껴졌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나도 저런 기운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가 드신 어른들은 보면, 그 사람이 어떤 표정 지으며 살았는지 주름에서 볼 수 있다. 많이 웃고 지낸 노인들은 그 미소를 고스란히 주름으로 간직하고 계신다. 여행하다가 문득, 자기 전에 여러 생각들 때문에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무언가 생각할 때 인상을 찌푸린다. 그걸 알게 될 때마다 의지적으로 인상을 풀려고 한다. 나의 주름살에도 나중에 미소가 깃들여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빨강 머리 앤이 할머니라면 사랑스러운 주름이 가득할 꺼라 확신한다.


브라티슬라바의 여러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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