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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나 Apr 22. 2021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런 적이 없다

발리 짱구

 스미냑을 떠나 짱구에 도착했다. 숙소는 스미냑이 집 같고 더 따뜻한 느낌이었지만 동네 자체는 이곳이 더 여유가 있어 좋다. 충분히 있을 건 다 있지만 한산한 느낌이라고 할까. 유모차를 끌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거 자체가 감사다. 낮잠 든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밥을 먹으니 훨씬 수월했다. 베트남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Batu Balong 비치까지 슬슬 걸어가는 데, 하늘빛이 아름다웠다.  오래간만에 선선한 바람도 불었다. 꽤 힙한 카페들이 많았고 길가의 개들 마저도 순진해서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스미냑에서는 개들 7-8마리가 우리를 향해 달려들면서 짖어서 엄청 무서웠던 기억 때문에 늘 개만 보면 어깨가 움츠려 들곤 했는데 여기 개들은 한 마리도 짖지 않아 얼마나 다행이던지. 역시 도시 개들과는 다르다는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비치의 온도는 적절히 따뜻해서 걷기 좋았다.  선셋은 놓쳤지만 선셋 후의 색깔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카메라로 잘 남겨지지 않는 황홀한 색깔이다.  내가 이 곳에 있는데 뭔가 여기가 어딘가 싶은 생각을 들게 만드는 오묘한 매력이 있다.


카메라로는 다 담기지 않은 그날의 색감. 신비로운 기분마저 들게 했던


여행을 다니면서 더 느끼는 건, 꼭 이 시간에 봐야 하고 놓치면 안 되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만의 시간이 있고 그 시간에 맞춰 지나다가 보면 보고 못 보면 못 보는 거지, 그게 그렇게 꼭 해야만 한다는 마음이 별로 없어진다. 늦어서 혹은 놓쳐서 누리게 되는,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인연들이 있다.


짱구는 스미냑이나 쿠따 비치같이 유명하지는 않아서 규모가 다른 도시에 비해서 크지 않았지만, 서핑을 좋아하고 디지털 노마드와 같이 장기로 머무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들었다. 와보니 디지털 노마드가 좋아하는 지역으로 인기가 많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적당히 있을 건 있고, 다른 지역에 비해 덜 북적 거리는 느낌이라 바쁜 지역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제격인 지역이다. 아이가 있는 가족들에게 좋은 이유는 걷기가 편해서 이다. 이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족이 여행할 때는 유모차를 끌고 걸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그 여행의 질은 꽤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짱구는 웬만하면 걸어 다닐 수 있어서 더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그랩 (Grab)이나 고젝(GoJek)이라는 앱을 이용해서 자주 이동했다. 우버와 비슷한 앱인데, 발리에서는 이 앱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앱을 통해 예약을 하면 운전사가 본인의 차로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시스템이다.


짱구의 여러 모습들


짱구에서는 비치도 걸어 다니고, 밥 먹으러 다닐 때도 늘 걸어 다니다 보니, 지나가다가 가고 싶으면 멈춰서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밤늦게 들어간 카페에서 아들이 호주에서 즐겨먹었던 와플 칩스를 발견한 게 보물찾기 한 듯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아들이 워낙 편식이 심하고 음식을 잘 먹지 않은 편인데 그래도 자기가 좋아했던 음식을 보니 어찌나 좋아했는지. 그 카페는 우리가 가장 자주 가는 아지트가 되어버렸다. 늦은 밤에 칩스를 먹는 아들과 발리의 신선한 스무디와 주스를 마신 그 사소한 시간이 짱구에서의 하이라이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아들이 종종 잠을 자는 시간에 남편과 둘이 밥을 먹을 기회가 짱구에서는 꽤 많았는데 그 시간들도 참 소중했다. 아이가 있으면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가 힘든데 그런 시간을 통해 대화를 제대로 하니 데이트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부부 사이에도 이런 시간이 정말 필요한 걸 아이를 낳고 더욱더 깨닫는다. 아이에게 가장 잘할 수 있는 육아가, 바로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고 들었다. 그런 면에서 서로 시간을 내어 관계에 투자하지 않으면, 부부 사이도 더 깊어질 수 없음을 안다. 짱구라는 지역은 우리 부부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준 곳이다.


아들이 일찍 잠든 덕분에 남편과 둘이 오붓하게 먹을 수 있었던 어느 저녁식사


짱구를 떠오르면 기억나는 게 또 있다.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는 화장실이 야외에 있어서 낮엔 더워서 불편하기도 했지만 저녁에 샤워할 때는 참 좋았다. 생각해보니 밤에 달을 보며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귀한 경험인가. 그러고 보니 내가 달을 보며 샤워를 한 적이 있었던 가,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런 적이 없다. 무언가를 처음으로 해보는 거 참 기분 좋다. 달밤에 야외 샤워 강추다. 살아가면서 이렇게 별거 아니라도 전에는 해보지 못했던 걸 하는 게 또 다른 무언갈 도전할 에너지를 주는 것만 같다. 아주 사소한 거라고 하나하나 해나가다 보면 내가 전에는 감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에 나도 모르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때가 많으니 말이다. 시드니에서 유학 생활을 했을 때, 혼자서 기차를 타고 1박 2일 여행을 간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혼자 여행을 한 기억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호주에서 그 시도를 할 땐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그땐 그냥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돌아보니, 그 이후에 친구들과 여행을 하거나 결혼 후에는 남편과 여행을 한 기억은 많지만 혼자서 여행을 한 기억은 그때뿐이다. 달밤 샤워, 혼자 떠난 여행, 신혼여행에서 했던 레게 파마, 이런 자잘한 도전이 쌓여 내 추억상자에 보관하는 재미가 여행의 묘미이자 일상의 묘미이자 않나 싶다. 


2018년 12월 발리에서


달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그 날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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