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반성문
그렇다. 나는 실패했다.
인생이나 결혼, 커리어에 관한 말은 아니다.(그런 것들은 특정 시기에 똑 잘라서 실패했어, 라고 말하기 어려운 대상들이라고 생각한다. 실패 중이라거나, 실패에서 벗어나고 있어, 처럼 진행형으로 밖에 말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실패한 건, 이 브런치를 시작할 때 뻔뻔스레 이야기했던 '꾸준한 글쓰기'다.
작년만 하더라도 일주일 1, 2일 정도, 특히 주말에는 새벽에 글을 쓸 시간이 잘 났던 편이었고, 그럴 때마다 적게는 1편, 많을 때 2, 3편씩 글을 적곤 했다.
그렇다면 일이 바빴느냐? 그것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 적어도 내가 지금의 직군을 선택한 이후로 일은 늘 하릴없이 바빴다. 양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의 문제라고 하는 게 적당할 듯한데, 작년 여름을 기점으로 회사에 인력 변동이 많았고, 불경기라 일감은 많이 줄었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도 확연히 줄어서 동분서주하는 시간들이 늘었다.(이직 후엔 늘 동분서주해 와서인지, 새삼스럽진 않았다.)
여하튼 한두해 일한 것도 아닌데 누군가 그만둬서, 혹은 일이 바빠져서 글을 쓰지 못했다고 말하는 건 나 스스로도 인정하기 어려운 핑계일 듯하다. 결론적으로 글쓰기에 태만해지게 된 이유는 글쓰기 이외의 것들에 눈을 많이 돌렸기 때문이다.(게을렀단 건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일 테니.)
나는 보통 새벽 일찍 일어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곤 했다. 그러다 작년부터 간간히 하던 조깅을 조금 더 열심히 하게 됐는데, 다른 시기에 비해 가장 적게 달리는 편이었던 겨울에, 그것도 새벽에 하는 달리기를 한번 매일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별다른 동기나 계기는 없었다. 그냥 가끔 하던 것을 매일 한번 해보고 싶었다.)
결론만 말하면 작년 가을부터 겨울, 그리고 봄의 문턱에 이른 지금까지, 나는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뛰고 있다. 글쓰기를 도외시한 건 부끄럽지만, 추위를 엄청 많이 타는 내가, 겨울 내내 하루도 조깅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은 나 스스로도 꽤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분이다.
게다가 이제는 그런 습관이 완전 몸에 배어서, 아예 자기 전에 내일 아침 뛸 복장으로 잠을 청하고, 눈을 뜨면 물 한 잔을 마신 후에 신문을 좀 보다가 천변길로 나서고 있다. 무리를 해서 무릎을 다치거나, 매일 뛴다는 다짐을 억지로 지키려다가 더 큰 낭패를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해, 보통 4~5km 정도만 달리고 들어온다. 꾸준함의 미덕으로, 나로서는 꽤 크게 체감될 만큼 체력이 좋아졌다. 다 뛰고 돌아와도 늘 깜깜했던 겨울과 달리 완주 후에 마주하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새벽하늘의 농담(濃淡)이 꽤 큰 일렁임을 안겨줄 때도 있다.
그 사이에 주변의 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두 아이 중 첫째가 이제 중학생이 되었고, 덕분에 남매는 더 이상 같은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무언가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전보다 두 아이들에게 양육자로서의 역할을 해줄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짬이 날 때마다 같이 놀이터를 나가고, 함께 배드민턴을 치고, 12세 관람가 영화도 이따금 같이 보면서, 아침과 점심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맛있는 것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내는 꾸준히 주말에도 출근하는 일을 하고 있고, 그 덕분에 주말 이틀을 온전히 함께 보내진 못하지만 퇴근 후에 만나 함께 장을 본다거나, 틈틈이 같이 미술관도 가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려 한다. 겨울 동안은 거의 하지 못했던 둘만의 아침 산책과 가벼운 등산을 최근 들어 재개하게 된 것도 큰 기쁨이다.(아내는 조만간 새로운 공부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많이 바빠지긴 하겠지만 그 과정이 주는 행복과 기쁨이 적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처럼 아침을 다른 것으로 조금씩 채우다 보니, 꼭 새벽이나 아침에만 글을 써야 되는 것도 아닌데도, 나는 글쓰기와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다. 주말에 아이들 점심을 차려준 후에나,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혹은 저녁 설거지를 마친 후에 노트북을 펼쳤어도 됐을 일인데 말이다. 대신 나는 그 1, 2시간을 찔끔찔끔 나눠서 읽던 책이나 영화를 보는 것으로, 그리고 축구경기 하이라이트와 웬그막을 시청하는 일로 보내곤 했다.(죄책감을 느끼진 않는다. 웬그막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반성문이란 소제목으로 포문을 열어놓고 전혀 반성을 하지 않고 있는데, 대제목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건 근황 알리기에 가까운 끄적임이다. 물론 다시금 물건백써를 잘 이어나가겠다는, 소리는 작아도 발음은 또박또박인 어떤 읊조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국은 써야 한다. 글쓰기는 나를 행복하게 하고, 앞에 이야기했던, 나를 채우고 충만하게 하는 다른 모든 것들과도 충분히 병행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물론 게으름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글쓰기로 채워졌던 시간들이 그간 무엇으로 흘러갔는지를, 나 스스로도 한 번쯤은 되돌아보고 싶어서 또 이렇게나 길고, 두서없는 문장들을 적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스물네 번째 물건백써를 쓰다 말았다. 아마 오늘 마무리가 안될지도 모르겠다. 그럼 또 어떤가, 달리기를 하고 와서,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놀고 와 점심을 먹은 후에라도, 아니면 당장 내일 출근해서 할 일들을 저녁 무렵에 되짚어 보다가, 잠시라도 짬을 내서 다시 쓰면 되지.
내가 무척 좋아하는(OST를 포함해) <라이터를 켜라>를 연출한 장항준 감독님이 천만 영화의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봄은 우리의 준비와 무관하게 기분을 달뜨게 할 때가 있는데 감독님의 흥행 소식이 어쩐지 나는 그런 봄기운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가늘지언정 한 번도 멈추지는 않았던 그분의 모습 덕분에 게으름과 낯부끄러움을 조금은 걷어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봄볕이 한결 따뜻하다. 다들 건양한 봄들 잘 맞이하시길.
머지않아 다음 게시글로 다시 만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