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신문

물건백써 #23 물건 백 가지에 대해 써 봄.

by 숲일생활


새벽 4시 55분. 보통 내가 눈이 떠지는 시간이다. 내 스마트워치의 알람은 늘 새벽 5시로 맞춰져 있다. 하지만 내가 알람음에 눈을 뜨는 경우는 잘 없다. 보통 알람이 켜지기도 전에 알아서 잠이 깨곤 한다(우리 어머니께서 딱 이러신 편인데, 이것이 유전인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잠을 설치는 것도 아니다. 난 누구보다 저녁잠이 많고,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이 드는, 숙면(熟眠)을 넘어 ‘속면(速眠)’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아침잠은 또 적어서, 초등학교 때도 혼자 알아서 아침 일찍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현관문 앞에 놓인 조간신문을 냉큼 챙겨 와 내가 가장 먼저 읽어본 뒤, 그래도 여유 시간이 남으면 혼자서 동네 뒷산이라도 올라가곤 했던 것이, 어린 시절부터 내가 누려왔던 주된 아침 풍경이었다.




오늘 이야기할 건 그런 내 아침 일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해 온 물건, ‘종이 신문’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도 조간신문을 받아 보고 있다. 이러한 신문 구독의 역사는 꽤 긴 편인데, 아주 어릴 때부터 난 온갖 활자를 읽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어머니께서 그런 내 모습을 보시곤 어린이신문을 몇 년간 구독시켜 주시기도 했는데, 그렇다고 내가 그것만 읽은 것은 아니어서, 매일 아침 어린이신문을 다 읽은 뒤엔 으레 함께 온 아버지의 조간신문을 내리 같이 읽곤 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온갖 이슈를 접하고, 날씨를 비롯한 최신의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지만,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신문은 복잡스럽게 돌아가는 세상 소식들을 모아놓고 한눈에 살펴보는 하나의 축소판이자, 나를 둘러싼 드넓은 세계를 조망하게 해주는 망원경이라 부를 만했다. 당시의 어린 나는 보통 1면의 특집기사를 대충 눈으로 훑어본 뒤, 주말의 명화를 비롯해 내 가장 큰 관심사였던 텔레비전 편성표, 신작 영화와 신간을 소개하는 문화면, 중간중간 삽입된 만화와 만평(초등학교 시절 내 확고한 장래희망은 만평 작가였다)에, 그저 놀랍기만 했던 각종 해외토픽, 그리고 나와 가족들의 하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오늘의 날씨까지 두루 살핀 후에야 다음 아침 일정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신문을 꾸준히 읽은 덕분에 나는 어른들 앞에서 YS와 DJ, JP에 대해 아는 척을 할 수 있었고,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지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어떤 예언을 제시할 수도 있었다. 또래들은 잘 모르는 가수나 영화감독, 배우에 대해 누나와 형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얼추 이해하고, 이따금 대화에 끼어들 수 있었던 것도 당시 하루하루 읽었던 신문 기사들의 영향이 컸다.


읽는 것을 좋아하고, 독해에 흥미를 느끼는 나의 성향은 이후에도 꾸준히 길러져서, 지문이 있거나 무언가를 읽고 풀어야 하는 모든 과목들(대개 국어, 영어, 사회 계열 과목들이다)은 늘 내 관심 속에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원리를 이해하고, 텍스트보다는 숫자와 기호로 접근해야 하는 그 반대편의 모든 과목들은 학습자로서의 내 세계관으로부터 아득히 멀어져만 갔다(지구과학이나 수학 통계처럼 문제상에 지문이 있는 것들은 일말의 흥미가 있었다. 그것이 올바른 풀이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그렇게 신문은 오랜 세월 동안 내게 아침을 여는 어떤 첫 동작과 같은 것이었다. 맨눈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세상을 마주하기 전에, 나로부터 조금 더 먼 어딘가를 둘러보며 지금 내가 놓인 자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관심이 큰 대상과 그에 비해 도외시하는 무엇 간의 거리감을 확연히 느끼게 해주는, 이를테면 줄자이자 컴퍼스 같은 존재였다.




다시 기상 시간으로 돌아와, 알람의 도움 없이 눈을 뜬 나는 5시 무렵 방을 나와 거실이나 부엌 귀퉁이에 자그마한 불을 켜고, 아침 조깅을 나서기 전까지 신문을 읽는다. 30분가량 신문을 정독하다 보면 자연스레 잠이 깨고, 뻐근하기만 했던 머리 곳곳이 점차 맑아지면서 조깅을 나서는 발걸음이 한층 더 가뿐해진다. 행여나 늦장을 부려 조깅을 먼저 나가게 된 날에는 돌아오자마자 잽싸게 샤워를 하고 신문부터 펼쳐 들곤 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신문은 소식이 느리다. 꼭두새벽에 받아 보는 매체라곤 하지만 결국 어제 있었던 일, 타이핑된 기사와 촬영된 사진이 편집돼 윤전기로 출력되기 직전의 소식들만이 실리게 된다. 하지만 보통 32면이나 되는 조간신문보다 많은 소식을, 그것도 실시간으로 빠르게 알려준다고 한들, 그걸 내가 제대로 다 소화나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느끼기엔 요즘의 세상은 소식을 전하는 것도, 다음 소식으로 넘어가는 일도 너무 빠르다. 특히 각종 뉴미디어는 우리가 채 소화하지도 못할 양의 정보와 콘텐츠, 이슈와 가십들을 감당하지도 못할 수준으로 빠르게 내어놓는다.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분주한 우리에겐 그것들에 관해 일일이 생각하고, 곱씹어 볼 시간과 여유조차 넉넉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미처 걱정하기도 전에 우리는 또 다른 이미지와 텍스트를 마주할 뿐이다.(게다가 그것들은 대부분 거칠게 재단돼 있거나, 성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납작하게 압축돼 있다.)


이에 비해 수발신이 더디고 해독이 느린 정보들은 우리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과 여지를 준다. 그건 분명 사람이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근저가 되어주기 마련이다. 내게는 한 권의 책과 오디오만이 존재하는 라디오, 그리고 매일 읽는 신문이 바로 그러하다.


정보를 수용하고 무엇을 파악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전에, 내가 가진 생각과 현실 사이에 놓인 충분한 시차와 거리감을, 신문은 제공해 준다. 그 이점을 더욱 충실히 누리기 위해 나는 요즘 저녁에 스마트폰으로 뉴스나 소식을 접하는 일도 차츰 줄이고 있다. 종종 TV 뉴스 정도는 보지만,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서 여러 일을 하며 온갖 정보와 미디어들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내 오늘 하루 몫의 소식과 세상사를 충분히 겪었다고 여기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자기 전까지 블루라이트로부터 벗어나 푹 쉰 나의 뇌와 시신경, 그리고 숙면으로 한층 여유로워진 마음을 품은 채, 늘어지는 하품과 함께 신문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그 아침의 30여 분이 나는 몹시도 소중하다.




그나저나 요 몇 년 동안은 신문을 열면 그저 한숨이나 너털웃음만 나오는 소식들이 너무나 많았다. 세계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어떤 권력가와 기업인들은 위태로울 정도로 성급하고 파괴적이며, 독선에 가득 차 있다. 의미 없는 전쟁이라고 하지만, 이미 무의미를 말하기엔 너무도 많은 희생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세대와 성별 간의 갈등은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지조차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지금도 그 틈바구니를 벌려놓고 있다.


우리 아들은 아침에 학교 갈 준비를 마치면, 어린 시절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보던 신문을 펼쳐 읽는다. 나는 종종 아이에게 이런 재미난 기사가 실렸다며 유심히 보길 권하기도 하지만, 실은 아이에게 권할 만한 소식이 무척이나 드물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낄 때가 더 많다.


느긋하게 세상을 관망하는 듯했던 내 어린 시절의 기분을 신문 지면 앞에서 다시금 느껴보고 싶다고 한다면, 너무 큰 욕심인 걸까? 어쩌면 호기심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엔 내가 너무 늙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일 아침, 아들에게 이것 좀 보라고 권할 수 있는 그런 소식들이 신문에 많이 실려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나부터 조금 더 똑바로 살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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