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백써 #22 물건 백 가지에 대해 써 봄.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 결코 부족할 일이 없었던 물건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수건'이었다. 평생 교사셨던 아버지, 성실한 합창단원이자 열성적인 반주자셨던 어머니, 그리고 무엇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두 분 덕분에, 우리 집은 늘 여기저기서 기념품으로 받은 수건들이 넘쳐났다.
그래봤자 수건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시절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행사나 모임, 기념식에서 빠지지 않고 손에 쥐어 주던 것이, 그날의 행사명이 색색깔 실로 휘황찬란하게 적힌 수건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우리 집에 있던 수건들 또한 그 출처가 실로 다양했다.
어느 교회 어르신의 권사 취임식부터, 아버지가 재직 중이시던 학교의 체육대회와 각종 행사, 그리고 지인들의 경사나 잔치에서 받아 오신 여러 수건들까지, 촉감과 색깔도 제각각인 그 수건들이 어떤 것은 단순한 프린팅으로, 또 어떤 것은 화려한 자수로 그날의 행사명이 새겨진 채 우리 집 욕실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무 글씨도 적혀 있지 않은 수건은 어째 낯설게만 느껴진다. 중학교 때였나? 꽤 잘 사는 친구 집에 우연히 놀러 갔다가 그 집 욕실에 걸린, 그저 새하얗기만 한 수건을 신기한 듯 바라본 기억이 있다. 호텔 같은 숙박업소에도 거의 가본 적이 없던 터라, 그게 그렇게 신기하기만 했었다.
아무튼 내가 결혼을 한 뒤로는(신혼 때는 어머니가 본가 창고 가득 쌓여 있던, 그간 차곡차곡 쌓아 온 수건들을 일부 내어 주셨다.) 점차 우리 가정의 대소사와 연관된 수건들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아이들의 어린이집 입학식이라던가, 유치원 졸업식, 그들 나름의 아기자기한 운동회와 이런저런 발표회 등에서 받아 온 수건들이 우리 집 수건걸이에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공사가 다망하셨던 우리네 부모님들에 비해, 운신의 폭이 좁은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요즘은 우리 부부의 명의로 온전히 입수되는 수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마 그건 점점 수건을 기념품으로 취급하지 않는 세태의 변화도 한몫을 했다고 본다.
몇 해 전,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 평생에 처음으로 새로 지은 아파트에, 그것도 첫 입주자로 발을 들이셨다. 전셋집을 전전하고, 늘 누군가가 살아왔던 곳에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셨던 두 분으로서는 몹시 설레고 보람된 기분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새집에 처음 갔을 때, 내게도 묘한 기분을 안겨준 물건이 있었다.
깔끔하게 인테리어가 마무리된 부모님 집의 욕실에는 같은 색깔로 쭉 나열된 수건들이 선반에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그 수건에는 어떠한 글씨도, 무늬도 보이지 않았다(귀퉁이에 자수로 들어간 작고 귀여운 스누피 하나만 빼고). 그건 꽤 낯설고도 어색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아무 글씨도 적히지 않은 빳빳한 수건에 손과 얼굴을 닦고 나니, 이런 사소한 변화조차 두 분에겐 꽤 좋은 징조이겠구나 싶어졌다. 가정뿐만 아니라 바깥의 많은 것들을 신경 쓰시고, 여남은 시간에도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남들을 챙겨야 했던, 그런 분주한 시간들이 계절처럼 지나가고, 이제는 두 분만의 보금자리에서 두 분만의 시절이, 편히 쉬는 여유로움으로 채워진 또 다른 시간들이 펼쳐지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갓 직조된 섬유의 보들보들한 살결이 살아 있는 수건의 기분 좋은 감촉은 그런 생각을 더욱 그윽하게 만들어 주었다.
얼마 전, 명절 연휴를 앞두고 미리 찾아뵌 어머니는 새 수건을 또 한 아름 챙겨주셨다. 우리 집은 두 아이까지 총 네 식구인 데다가, 하루하루 낡아져 가는 수건에 비해 새 수건이 들어올 일은 비교적 적다 보니, 부모님네 창고에 풍성히 쌓인 새 수건들을 또 신세 지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쓰기 편하라고 한 아름의 수건을 모두 빨아, 건조기까지 돌려주셨다. 덕분에 집에 가져온 수건들은 마치 호텔의 그것처럼 뽀송하고 부드러웠다. 습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것들은 심지어 냄새도 좋았다. 고작 수건 하나 바꿨을 뿐인데, 샤워를 하고 나와 몸을 닦는 시간이 훨씬 더 포근하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새로 받아 온 수건들로 욕실 선반을 채우고, 낡고 해진 수건들을 정리하는데, 어쩐지 아이들 행사와 관련된 수건들은 마냥 버리기가 마음에 걸려 몇 가지만 한구석에 따로 모아두었다. 아내에게 새 수건으로 욕실을 업데이트했다고 말하자, 잘했다는 칭찬이 돌아왔다. 그날 저녁,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앞으론 정기적으로 수건을 바꿔줘야지. 그리고 그 김에 나도 모르게 쌓인 식구들의 수고와 노곤함도 같이 한번 잘 살펴봐야겠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