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원더우먼, 엄마.
중학생 때 나는 외고 입시를 준비하는 학원에 다녔다. 방학이면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종일 그곳에서 수업을 듣고 자습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날은 천둥 번개가 치던 여름 방학이었다. 집에서 점심밥을 먹고 다시 학원으로 가야 하는 시간, 나는 번개 때문에 학원에 돌아가는 길이 무섭다고 칭얼댔다. 육교를 건너다 번개에 맞으면 어떡하냐고. 엄마는 웃으면서 후다닥 뛰어가면 괜찮다고 했다. 어깨를 툭 치며 서둘러 보내려 하는 엄마에게 나는 괜히 성질을 부렸다. '엄마는 번개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모르지?' 입을 비죽댔다. 그때 엄만 당신도 번개를 무서워한다고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짜?'라고 묻자 '그럼. 엄마도 번개 무서워해.'라던 엄마의 대답.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엄마도 무언가를 무서워한다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15년이 흘러 서른 살이 되었다. 엄마는 부쩍 이전의 일들을 잊는다며 뇌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다녀왔다. 그런데 그냥 가볍게, 노후 대비 차원에서 받아본 건강 검진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받았다. 뇌혈관이 막혔다는 것. 무겁고 무서운 결과였다. 집에서 독립한 나는 그 사실을 카톡으로 전달받았다. 믿기지 않는 메시지를 받고 잠시 우두망찰. 곧 엄마에게 자세한 설명을 재촉했지만 엄마는 피곤하다며 더 이상 답을 주지 않았다. 애타는 나는 인터넷에 관련 내용을 찾아보고 불안해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엄만 왜 이렇게 덤덤한 거야. 툴툴거리기도 하면서. 길고 지난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다음 날 추가 검진을 하러 간다는 엄마의 말에 채비를 하고 따라나섰다. 의사 선생님께 직접 설명을 듣겠다는 생각으로. 피를 뽑고 혈압을 재는 등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엄마의 경동맥 검사를 어두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잠시 후, 엄마는 아주 환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별 일 아니랜다.' 그제야 퍼지는 안도의 미소. 완전히 건강한 건 아니지만 안 좋은 부분을 약으로 조절할 수 있는 정도라고 했다. 엄마는 확연하게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전날 금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러 근처 매운탕 집으로 향했다. 보글보글 끓는 빨간 국물 앞에서 엄마는 내게 고백했다. 어제 나와 연락을 하곤 무서워서 하루종일 심장이 쿵쾅거렸다고. 아빠에게 결과를 알리지도 못하고 혼자 두려움에 떨었다고. 죽음이 얼마 안 남았다는 덜컥하는 생각에 잠도 못 잤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고백이 새삼 낯설었다. 15년 전 번개를 무서워한다고 했던 때처럼 엄마에게도 두려운 대상이 있다는 게 이상하게 생소했다. 전날 아무렇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님 내게 엄마는 여전히 의연하고 강한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었을까. 전지전능한 신이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몰래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밥을 먹으면서 엄마는 문득 10여 년 전 이야기를 꺼냈다. 그날도 건강 검진 날이었다. 정확히는 엄마가 검진 결과를 받아온 날. 따뜻한 대낮이었는데, 엄마는 서재에서 조용히 결과지를 앞에 두고 멍하게 앉아있었다. 갸우뚱한 내가 다가가 상황을 묻자 엄만 '폐암일 수도 있단다.'라는 말을 전했다. 과연 결과지에는 '폐암 의심.'이라고 무시무시한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엄만 그 순간에도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고 난 터덜터덜 방에 들어가 펑펑 운 기억이 있다. 엄마가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모른다. 내게 보여줬던 멍한 표정이 전부였고 그것 때문에 나는 별일 없을 거라 믿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나처럼 울지 않았으니까. 엄만 괜찮겠지. 이렇게 말이다. 아주 다행히 결과는 당시 인턴 신분이었던 의사의 오진이었고, 엄마의 폐는 지금도 건강하다.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병원에 나와 의자에 한동안 앉아있었어. 너무 놀라서 걸을 수가 없겠더라고. 정신이 들 때쯤에서야 공포감이 몰려왔고 눈물이 막 나더라. 나도 나지만 내 가족은 어떡하나 싶어서.' 엄마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다. 치료비 때문에 우리 가족이 무너질까 싶어서, 자기가 민폐가 될까 봐 걱정이 됐다고 했다. 이 날도 아빠에게는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고 친구 한 명에게만 털어놨다면서.
나는 또 한 차례 놀랐다. 바보 같이. 당연히 무서운 일인데 왜 엄마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고 또 상황도 나아질 거라 막연히 믿었을까. 엄만 영원히 의연하고 태생적으로 강한 사람이라 여겼던 걸까. 실은 엄마도 나처럼 겁이 많고 여린 사람이었는데. 혼자 끙끙 앓고 무서움과 외로움을 동시에 견뎌야 했을 텐데. 내가 모르는 불안이 많았을 거란 생각에 엄마가 안쓰러웠다. 간과했던 엄마의 지난날들에게 미안했다. 밥을 다 먹고 엄마에게 부탁했다. 앞으로 무서운 일이 있으면 무섭다고 말해달라고.
엄마가 슈퍼우먼도 원더우먼도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안다. 늦었지만 이제 진짜 알겠다. 엄만 그냥 이 악물고 버텨왔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