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통하지 못한 일기

by 수신

1.


디카페인 커피를 마셨음에도 여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몸에 밴 백수적 루틴 때문이겠다. 백수적 루틴이란 하고 싶은 일들을 전부 하고 잠에 드는 것이다. 공부와 운동과 독서와 애정하는 연예인 유튜브 영상 시청까지. 그중 네 번째 일과가 가장 몰입도 높은 행위이자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일이고(흥분치를 MAX로 찍어 억지로 폰을 끄고 누워도 그들의 얼굴이 비문증처럼 떠다님). 그래서 지금도 깨어있다. 내일 오전 8시로 맞춰놓은 알람은 무용지물이겠지. 늦잠은 악취미에서 악습관으로 발전했다.



2.


백수가 되고 그리운 건 창백한 아침의 민낯이다. 어둠의 전장에서 싸워 돌아온 승전병의 피곤한 얼굴 같은 것. 그것은 기지개를 펼 준비를 하고 어둠을 이겨낸 위풍당당함을 서서히 드러낸다. 오전을 거쳐 밝아진 안색의 낮을 맞이하며 일어나는 일도 즐겁지만, 창백한 민낯은 나의 그것과도 비슷해서 같이 기지개를 켜는 일 또한 나름의 재미가 있다. 세수를 하고 흐트러진 이불 틈에 다시 들어가 화장을 한다. 보풀이 인 니트를 머리통에 집어넣고 정전기를 턴다. 열 개 묶음으로 사둔 같은 모양의 양말들 중 하나를 집어 신고 무선 이어폰을 귀에 꼽는다. 집 밖을 나서기 직전엔 손 떼 묻은 창문을 급히 열고 환기를 한다. 그때 들어오는 바람은 승전병의 한숨이다. 안도의 한숨. 기어코 어둠을 몰아냈다는, 혹은 버텨냈다는 작은 숨. 덜컥이는 마음에 밤을 꼬박 새운 날에는 그 숨이 애틋하고 반가워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즐거움은 여기까지. 출근길은 그립지 않다. 언제나 조금씩 지연되는 일호선에 몸을 싣고 숨을 참은 채 이호선으로 환승을 한다. 바깥과 다르게 그곳은 아직 전장이고, 사람들은 패잔병의 얼굴을 하고 있다. 싸움을 거는 이도 없는데 지는 기분이 지속된다. 허공을 바라보다 홀로 들고 있는 고개가 어색해 억지로 핸드폰을 켠다. 거북목은 여기서부터 몸집을 키워나간다. 지난밤에도 눈이 아플 때까지 핸드폰을 봤는데 여기서도 봐야 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대결이다. 무언가를 대충 보는 척을 하다 보면 또 다른 전장에 도착해있다.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익숙한 거리를 지나 사무실에 안착한다. 사무실엔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있다. 누가 누군지 분간이 어렵다. 나 또한 상대의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없고, 각자 투명한 창과 방패를 허리춤에 찬 채 8시간을 버틴다. 그건 싸움이 될 수도 있고 고문이 될 수도 있다. 가끔은 화합의 장이 열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드물다. 대부분 없거나 있어도 아주 잠시일 뿐. 퇴근 시간이 되면 바깥은 어둠과의 대결을 준비 중이고, 나는 창백한 아침의 민낯과 다름 없는 표정으로 집에 돌아간다. 비로소 기지개를 켤 시간이다. 직장인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3.


백수는 방랑객이 아닌 작은 모험가. 4년간의 규칙을 깨고 새로운 일상을 맞이하고 있다. 거창하지 않은 도전을 하면서, 또 무얼 시도해 볼까 고민하면서. 반복되지 않는 것은 활기를 준다. 물론 반복적인 것들 중 활기를 주는 일도 있다. 바로 일기 쓰기다. 하루를, 생각을, 감정을 시시각각 기록하는 일. 일기장에 쓰고, 가방에 넣고 다니는 작은 노트에 쓰고, 블로그에 쓰고, 브런치에 쓴다.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일과일지라도 자꾸 쓰고 싶어서 펜을 들고 노트북을 켠다. 왜 쓰는가,라고 물으면 재밌어서라고 답한다. 요 몇 달간 굳어서 손으로 긁어내면 부서져버리는 액체였을 무언가의 자국처럼, 생각의 우물 같은 게 말라버려서 얼룩만 남았다고 여겨왔는데. 다행히 아니었다. 퇴사를 하고 나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더 이상 양동이로 바닥을 긁어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비워내지 않으면 새로운 눈금을 자꾸 만들어낼 것이다. 그것이 지리멸렬한 방향으로 뻗어 나갈지라도 단수가 되지 않았음에 기뻐. 갈증이 나도 괜찮다.


샘물은 건재하다. 그칠 줄 모르는 기쁨처럼 계속 샘솟으리.



4.


가끔 자신감이 없고 문득 그것이 넘쳐 난다. 군학일계 같다고 좌절하다가 군계일학이 아닐까 설레고. 평범함 중 유일함을 찾지만, 독특함 중 무난함을 발견하곤 슬퍼하지. 손금이 평범해서 울었다는 그의 말이 떠오른다. 이젠 나를 알겠다고 자만했다가 여전히 내가 제일 어렵다고 느낀다. 네가 말했지. 인생은 나를 찾는 여정이 아니라 완성해나가는 여정이라고. 그렇다면 자만은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하는 게 맞겠다. 애타게 자신감을 찾으러 다닐 필요도 없다. 알쏭달쏭한 나는 사실 미완성 상태니까. 갸우뚱하는 건 당연한 거야. 모래 속 어질러진 퍼즐 조각의 현재. 완벽하게 껴맞춰진 나를 당장은 알 수 없을 것이고, 또 원하지도 않는다. 여집합 속에서 둥둥 떠다녀도 좋다. 혹은 교집합에 꽉 끼인 채로 머물러도 좋다. 자금자금한 그것들은 서서히 몸집을 부풀릴 것이고, 한데 모일 것이며, 종국엔 전체를 이뤄낼 테니.



5.


나 말고 너에 대해 써야 하는데. 글은 그렇게 쓰는 거라 했는데. 나는 자꾸 내 얘기만 한다. 나밖에 모른다. 온통 나로 점철되어 있다. 나, 나, 나. 자의식으로 꽉 차있다. 길을 걸을 땐 긴장된 채로, 방 안에선 풀어진 채로 나만 생각한다. 어디서 봤는데 물병자리의 특성이 그렇단다. 오로지 나인 세상. 내가 주인공이지만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없는 무대. 초대받은 관객도 또 다른 나. 그 외는 없음. 비대한 자아.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이 쉽지 않다. 그냥 타인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것은 쉽지. 내 시선으로 바라보고 내 입장에서 생각하니까. 근데 그거 말고. 너의 삶에 들어가서, 너의 시선으로, 너의 감정을 덧입고 네가 보는 또 다른 풍경을 상상하는 일이 어렵다. 네 일상에 나를 덧대어보는 일. 쉽게 말해 입장 바꿔 생각하기. 네 일상에 나를 덧대어보는 일. 예를 들면 엄마. 나는 어디까지나 딸의 입장에서 엄마를 생각하고 판단한다. 엄마의 입장에서 그녀의 삶을 상상한 적이 거의 없다. 그녀가 아침에 침대를 정돈하며 계획하는 하루 일과. 거리를 걸으며 발견한 것에 카메라를 들이밀며 하는 생각. 그녀가 병원에 다녀와 안 좋은 결과지를 들고 친구에게 쏟아내는 두려움의 형태. 그녀가 사는 세상의 자세한 모양을 나는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가 모르는 그녀의 삶을 내 멋대로 추측한다. 대개의 딸들이 그러하듯 엄마라는 존재를 안쓰러워한다. 연민한다. 함부로 효도한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도움의 손길을 뻗는 것처럼. 그 마음은 이타적인 걸까 이기적인 걸까. 나를 잠시 멈추고 너의 오늘을 상상해 본다. 소설을 빌려 다른 세계를 체험하듯 너와 나눈 대화를 빌려 너의 세계를 읽으려 노력한다. 하루쯤은 너로 살아보고 싶어. 그럼 너에 대해 잘 쓸 수 있을 텐데.



6.


독서가 취미지만 누군가 내게 책을 많이 읽는다는 말을 건넨다면 거대한 도서관에 빽빽하게 들어앉은 책등의 모습이 떠오르고 내가 읽지 않은 수천 개의 것들을 생각하며 작아진다.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 묻는다면 나는 신나게 몇 명의 이름을 댈 수 있지만, 내가 과연 그들이 쓴 책을 모두 읽어봤는지와 어느 지면에 발표했을 아직 책으로 엮이지 않는 글까지 찾아 읽는지, 그들의 문체와 하나로 관통하는 주제를 파악하고 있는지, 나는 그저 그들이 쓴 이야기들 중 하나가 유독 인상 깊었고 이야기 속 주인공이 애틋할 뿐인 것은 아닌지 고민하며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7.


'인간은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온전한 존재가 되려는 힘이 강해지기 때문에, 삶이 부서진 어떤 사람에게 '예술적 자극'은 곧 '치유적 자극'이 된다는 것. 그렇다면 아름다움(예술)은 인간을 '해결'하는 사랑의 작업이 되고, 그렇게 치유되면서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분쟁'과 다시 맞설 힘을 얻게 된다.'


6년 전 취업 준비생일 때 매일 서점을 찾은 것은 미적인 것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치유가 필요해서겠다. 그땐 나의 우울을 해결해줄 무엇을 책에서 찾았다.



8.


갑자기 정용준 작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의 소설을 읽은 지 몇 달이 지났고 북토크를 다녀온 감명도 희미해졌는데. 오랜만에 그의 오디오 클립을 튼다. 단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마음이 편안하다.



지난 여름, 망원동 서점에서 진행된 그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나는 그가 쓴 책들의 애독자도 아니며, 읽어본 그의 소설은 단 한 권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만나러 나선 건 문학잡지 <릿터>에서 읽었던 어떤 구절 때문이었다. ‘열심’이라는 단어를 탁월하게 표현했던 문장.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 문장만으로 난 정용준 작가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를 좋아하고 소설을 좋아하는데, 마침 그의 신간 제목이 <소설 만세>이고, 그것을 주제로 북토크가 열린다면.


안 갈 이유가 없었다.



행사는 소설을 향한 그의 열렬한 애정을 온몸으로 느꼈던 시간이었다. 그는 책 제목처럼 소설을 찬양하는 사람이다. 다만 애증의 마음으로 한다. 둘 사이에서 외줄을 타면서. 내가 해석한 그는 읽고 쓰는 것을 괴로워하지만 절대 놓지 않는 사람이고, 누가 이기나 덤비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자고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는 사람이다. 그래, 그게 찐 사랑이지. 그런 그를 보며 대상을 좋아하는 마음은, 좋아하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빛은 이토록 반짝인다는 걸 깨달았다.



나도 소설이 좋아요. 나의 독서 기록은 작가님 것의 반의반의 반도 못 따라가겠지만, 나 또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언젠가 긴 서사를 써보고 싶어요. 그런 꿈이 있어요. 집 가는 길 내내 벅차올라 곱씹었던 말. 소설 만세 대신 정용준 만세를 외치고 싶었던 날이었다. 꽤 오랜 시간 품어온 작은 불꽃에 그가 불쏘시개를 던져주어서. 접어둔 페이지의 모퉁이를 다시 펼쳐보고 싶게 만들었기에. 글을 읽으면 작가가 좋아지고 작가가 좋아지면 그가 뱉는 모든 말이 마치 잠언처럼 느껴지는 마법. 그날이 꼭 그랬다.




9.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만일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고 또 소통하면서 그를 자기 안에 들인다. 이 일이 쌍방향으로 일어날 때 우리는 서로를 나눠 가지면서 '나도 그도 아닌' 제 3의 존재가 된다. 내 말과 행동 속에 그의 영향이 배어 있다고 느낄 때 나는 내 안의 그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설사 상대방이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때 내가 하는 말은 나를 통해 그가 하는 말이고, 이제 그는 나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안에 너 있다.(ㅋㅋ)


10.


도망다니며 글 쓰기. 가끔 글 쓰기는 숨이 찬다. 내밀한 이야기는 낯선 곳에서 하고 싶어서. 양조위가 나무 구멍에 대고 비밀을 속삭인 것처럼, 나는 나를 누설할 구멍을 찾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엄마도 무서운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