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그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구나무서기 Feb 15. 2023

카드 대신 현금을 꺼낸 이유

애초부터 현금으로 결제할 생각이 있던 건 아니었다.


혼자 찾은 온천욕을 끝내고

밤늦게 어디선가 그래도 그 지역의 맛집 어디선가 끼니를 근사하게 때우겠다는

생각이었다.


결제는 당연히 카드 결제로 생각했을 뿐이다.

카드가 더 좋아서 그렇다기보다는, 기록이 남으니 훗날 내가 이번 여행에서

어디서 무얼했는지 나중에 찾아볼 수 있겠다는 측면이 개인적으론 더 크다.


밤 늦은 섬의 식당에는 손님이 딱 2명 있었다.

카카오맵 평점은 4.5점으로 훌륭해 저녁 늦게라도 손님이 좀 있겠거니

그래서 혼자 간 손님은 안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실제로는 한산했고 차라리 잘 됐다 생각이 들었다.


식당에 들어서며

1만5천원짜리 한상차림을 주문했는데

여주인은 한상차림은 2인분 이상이어야 한다며

황태해장국, 청국장 같은 식사 메뉴를 추천했다.


멋쩍음을 뒤로 하고

'한상차림을 2인분 주문해서 제대로 먹어보고 갈까' 하는 호기를 떠올렸지만

추천해준 식사도 맛있겠다 싶어서

청국장 1인분을 주문했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는지 메뉴판이 눈에 잘 안들어오나 보다.

식사를 주문하고 메뉴판을 보니 한상차림은 2인분 이상이라 써있고

감사하게도 청국장 식사메뉴는 아침식사만 된다고 써있다.

여주인의 미안해하는 표정에 더불어 다른 식사를 추천해준 배려에 감사함이 들었다.


따뜻한 보리차다.

식당에 가서 차를 끓인 물을 제공하는 집은 맛집이라는

백종원 요리사의 얘기가 있었던가.

어디선가 줏어든 그 말이 반갑다.

나는 이 늦은 저녁에도 혼자서 맛집을 찾았다는 뿌듯함이 잠시 밀려온다.


청국장이 끓다가 넘쳤는지 액체가 불에 타는 소리가 들린다.

집에서 자주 듣던 소리다.

냄비에 국이, 물이 넘쳐서 무언가 치지직 기체로 타버리는 소리.


여주인이 헐레벌떡 주방으로 뛰어가서 상황을 수습한다.

요리 하는 와중에도 휴대전화 벨이 계속 몇번이나 울리는데 매번 그 전화를 받는 모습에

'음식에 집중 못하는 걸 보니 장사가 안 될 수도'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였다.


청국장이 나왔다.

붉은청국장색깔 국물이 검은 뚝배기를 넘쳐흘러간 모습이 선명하다.


잠시 후 남자 한명이 가게를 찾았다.

손님인가 싶어 내가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으나, 대화를 들어보니 그녀의 남편이다.

두분 다 선하게 생긴 모습이 식당을 꾸준히 열심히 하는 분이다 느낌이 온다.


남편에게 그녀가 말했다.

집주인한테 전화가 왔는데 집 수리비 320만원이 나왔다. 그중 120만원은 우리가 부담해달라고 한다. 대신에 내년에 월세를 올릴 거니 거기서 제하는 셈치는 걸로 하자고 한다. 어떻게 할까?


보아하니 이 동네에서 식당을 제법 오래 한듯한데 아직 월세에 뭔가 자영업자의 고충이 느껴진다.

눈에 익숙한 모습이다.

모든 게 행복하게 잘 돌아가는 것 같지만

카카오맵의 평점은 4.5점에 맛집으로 평가받지만

평점이 인생의 모든 것은 아니다.


남편은 대답이 없다.

이 또한 익숙한 모습이다. 식당으로 그녀가 생계를 이끌어가고 남편은 무언가 분주하게 하는듯 하지만 돈과 연결되는 일은 아닌듯 하다.

주변에서 많이 봐왔다. 이런 부부관계.


그래도 그녀는 남편을 의지한다.

아마 손맛이 좋다고 칭찬을 들어왔고 그래서 동네에서 인정받는 식당을 만들었지만

인생의 파도를 넘기엔 역부족이었을 거다.

음식이 맛있다고 인생 또한 잘 풀리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남편은 뭔가 고심하는듯 카운터에서 생각을 하더니

식당 사업자로 계산서 발행이 되느냐를 물어달라 한다. 그게 나중에 비용처리가 되니 그게 더 낫다고 판단한 듯 하다.

그녀는 다시 전화를 들었고 된다는 답변을 듣고 보고한다. 

남편은 그게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여겼고 부인에게도 그렇게 해결사의 모습으로 설명한다.

물론, 어떤 게 더 나은 방법인지 나는 모른다. 섣불리 판단하기도 그렇지만 그저 그는 해결사의 든든함으로 그의 역할에 충실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의지할 곳은 부부뿐이던가.

찬바람이 거칠게 살을 스치는 바닷가의 한 섬에서

살아가는 방법이 뭐 그리 다양하겠느냐만은.

익숙함이 내겐 생경한 섬의 한 식당에서도 펼쳐지고 있었다.


세금에 대한 얘기를 어꺠너머로 듣고나니

카드 대신 현금으로 청국장 한그릇을 결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 곳에서 한번 찾은 이곳에서

내가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저 이야기를 못들은 척 뒤로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인생의 요령보다 밥 한끼 챙겨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 여기고 살아왔을 것이다.

한때는 동네에서 주목받았을, 선하면서도 분명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의 인상을 보며

처음의 마음처럼 마지막에도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언가 그녀의 인생에 대한 보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터무니없는 억측과 함께 말이다.


현금이 전부는 아니지만, 모르겠다.

나는 카드 대신 현금 1만원을 내고 가게를 나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