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에게도 빼앗기지 않던 내마음 훔쳐간 그 시골 아저씨
아비즈(Avize)는 샴페인 중심지로 잘 알려진 랭스나 에페르네보다 훨씬 작고, 멀리 떨어져 있는 시골 마을이다. 앞의 두 곳과 비교할 것도 없이, 누구나 가보면 '아, 시골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한적하다. 그러나 나는 샴페인을 여행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곳을 최우선순위로 놓았다. 모든 일정을 아비즈에 방문하는 기간에 맞추어 짰는데, 이때문에 포기한 곳도 많았다. 좀더 유동성있게 계획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어찌하리. 최고 목표를 달성한 것 만으로도 이미 여행의 절반은 성공했으니 만족이다.
에페르네에서도 차를 타야만 올 수 있는 이 시골까지 온 이유는 이곳에 샴페인을 놀랍도록 잘 만드는 소규모 와이너리가 많기 때문이다. 대체 이곳의 와이너리들은 어떤 환경에서 샴페인을 만드는 지 너무 궁금했다. 그중에 하나는 가히 전설이라 불릴만한 와이너리 '자크 셀로스(Jacques Selosse)'다.
샴페인책을 읽다 보면 거의 빠짐없이 이 와이너리의 오너이자 와인 메이커인 안셈 셀로스(Anselm Selosse)의 얼굴이 실려있는데, 독보적인 스타일의 샴페인을 만들어서 와인 애호가는 물론이고 샴페인 전문가들의 극찬을 받고 있다. 그의 샴페인은 프랑스 미식 가이드 고 에 미요(Gault et Millau)에서 1994년에 모든 종류의 프랑스 와인중 최고의 와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셀로스는 와이너리 바로 옆에 작은 호텔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와이너리 투어는 호텔에 묵는 투숙객에게만 예약 기회가 돌아오기에 주저없이 자크 셀로스 호텔에 짐을 풀었다.
과연 이곳에 호텔이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들판과 숲, 집밖에 없었다. 마침내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곳에 도착하자 아담한 규모의 호텔이 보였다. 늦은 밤에 도착했는데도 리셉션의 직원 분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호텔에 오기전 메일을 주고받았던 패트릭씨였다. 패트릭씨는 필요하면 짐을 위층까지 들어주겠다고 활기차게 말했다. 별 생각없이 감사하다며 캐리어를 건넸는데, 아차 싶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할아버지였다. 그냥 내가 들걸. 가쁜 숨을 쉬며 올라가는 모습을 보자니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는데, 패트릭씨가 캐리어를 내려놓고는 아무렇지 않다는듯 차분한 목소리로 호텔 시설을 설명해주었다. 호텔에 도착한지 10분 정도 되었으나, 이 인간미 넘치는 직원분 덕에 벌써 편안함이 느껴졌다.
셀로스 호텔에 머문 때는 막 코끝이 차가워지기 시작한 11월 중순이었다. 밤에는 약간 쌀쌀해서 실내 온도 조절을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패트릭씨는 "셀로스씨는 이 호텔이 최대한 자연적으로 운영되도록 만들어서 온풍 조절 시설이 따로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호텔을 천천히 둘러보니 냉장고도 없었다. 과연 '셀로스'스러웠다.
셀로스 와인은 자연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만들어진다. 안좋았던 기후나 병충해를 극복하려 제초제나 화학 비료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의 와인처럼 호텔도 최대한 자연과 가깝게 만들어졌다보다. 인위적인 힘을 빌리지 않아도 충분히 잘 운영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의 철학을 존중하지만, 한겨울에 방문한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추위를 타는 손님이 많았는지 패트릭 씨가 작은 휴대용 온풍기 하나를 가져다 주었다.
이튿날, 아침을 먹고 산책하던 중 우연히 셀로스씨를 만났다. 어떤 아저씨가 "봉슈!"하고 인사를 건넸는데, 자세히 보니 책에서 본 그 아저씨였다. 마치 책에만 존재하는 역사 속의 인물을 만나는 것 같았다. 호텔 바로 옆에 와이너리가 있어서 호텔에 묵는 기간동안 그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셀로스씨 역시 이웃한 아그라파(Agrapart et Fils) 와이너리의 주인 파스칼씨와 마찬가지로 일하기 편한 옷을 입고 다녔다. 직접 손을 걷어붙이고 매일같이 샴페인을 돌봐야 하니, 말끔한 정장보다는 활동성 좋은 옷을 입는게 당연하기도 하다.
이 샴페인 하우스는 1950년 안셈 셀로스의 아버지 자크 셀로스가 세웠다. 자크 셀로스는 샹파뉴 지역에서 빠르게 명성을 쌓았고, 와이너리의 인기는 1980년에 이어받은 안셈 셀로스때 치솟게 된다. 안셈 셀로스는 부르고뉴에 있는 코쉬 뒤리(Coche Dury)와 르플레브(Leflaive)에서 경험을 쌓은 뒤, 아비즈로 돌아와 부르고뉴 와인을 만드는 방식을 최초로 샴페인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 솔레라 시스템(주정강화 와인 셰리를 만들때 사용하는 방법)을 샴페인에 적용하는 혁신을 일으킨 존재이기도 하다. 그만의 행보는 독특한 맛의 샴페인을 만들어냈고, 그 덕에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현재는 안셈 셀로스의 아들 기욤이 가업을 잇고자 6년째 함께 일하고 있다.
드디어 와이너리 투어 날이다. 이날 아침에는 투어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호텔 로비가 북적였다. 매년 한 번씩 셀로스 호텔을 찾는 독일 부부, 10대 아들과 어린 딸을 데리고 함께 온 프랑스 가족, 일본에서 온 와인 애호가 등 이 작은 곳에 직업도, 국적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 와이너리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 후, 안셈씨가 직접 투어를 진행했다. 그는 먼저 와인에 대한 생각부터 이야기했다.
자크 셀로스 하우스에서 와인은 곧 자식과 같다. 그래서 안셈씨에게 '와인 메이커'라는 단어는 이상하게 들린다. "내 와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건 마치 내 자식을 베이비 메이커가 기르는 것과 같아요." 그가 확고한 표정으로 말했다. 첫째로 내 자식은 내가 가장 잘 알며(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둘째로 자신의 것은 스스로의 책임감과 정성으로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4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가 계속 와인 메이커로서 활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샴페인이 세계 최고의 스파클링 와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내 자식은 내게 최고지만, 남들에게는 최고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스페인에 가면 카바가 최고의 스파클링 와인이고, 이탈리아에서는 프로세코가 최고의 스파클링 와인이다. 게다가 그는 본인에게도 내 자식이 최고가 아닐 때가 있다며 농담을 던졌다. 자식이 미울 때도 있고 고울 때도 있는 것처럼 와인도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자식을 열심히 기르는 일 뿐이다.
작은 와이너리 안에는 오크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부르고뉴 지역에서 쓰이는 오크통처럼 작은 것도 있고, 사람 서너 명이 들어갈 정도로 큰 것도 있었다. 안셈씨는 발효, 숙성 등 와인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 오크통을 사용하는데, 오크통의 미세한 구멍 사이로 공기가 드나들며 와인이 미세하게 산화한다. 셀로스 샴페인만의 맛의 비결 중 하나도 바로 이 오크통 사용에 있을 것이다.
셀로스 샴페인에서 솔레라(solera)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솔레라는 스페인의 주정강화 와인 셰리(Sherry)를 만들 때 사용하는 숙성 방법으로, 매년 날씨의 변덕에 따른 작황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발명되었다. 와인이 들어있는 오크통들을 3단으로 쌓아놓고, 맨 위칸에서 조금씩 새로 만든 와인을 채워 기존에 있는 다른 빈티지 와인들과 섞는다. 그리고 맨 아래칸에서 와인을 조금씩 꺼내 판매한다.
셀로스 샴페인에도 이 방식이 사용되는 것으로 유명한데, 현재 가장 오래된 저장 와인은 1986년 산이다. 그가 솔레라 방식을 쓰는 이유는 테루아(땅, 기후 등 포도밭을 둘러싼 자연)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는 그가 가진 33헥타르의 작은 밭의 특징을 살려내고자 했다. 다른 해보다 덥거나, 춥거나, 건조하거나 습한 날씨의 변화를 솔레라 시스템에 넣으면 늘 일정한 테루아의 특징만이 남게 된다. 이 방식으로 만든 대표적인 샴페인이 셀로스의 '섭스탕(Substance)'이다. 솔레라 시스템의 적극적인 활용으로 셀로스 와이너리는 부르고뉴 와이너리를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오크통으로 채워져 있다.
셀로스 샴페인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도자주(dosage, 샴페인 코르크를 막기 직전에 넣는 당과 와인의 혼합물) 양이 무척 적다는 점이다. 도자주는 최종 샴페인의 단맛을 결정하는 요소로 알려져 있다. 많이 넣을수록 달콤해지며, 기본적으로 가장 많이 생산되는 브뤼(brut)는 리터당 12g이 허용된다. 그런데 자크 셀로스의 도자주 양은 리터당 1g이 안되거나 조금 넘는 정도다. 포도가 아주 잘 익기 때문에 당을 많이 넣지 않아도 균형잡힌 샴페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적은 양은 이해한다고 쳐도, 소수점 단위까지 세어 넣는게 전체 샴페인의 맛에 영향을 미칠까? 안셈씨는 '도자주는 와인의 요소들을 조화롭게 드러낼 뿐 아니라 완전한 테루아의 성격까지 드러내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그냥 단맛만을 정하는 요소가 아니라 더 복합적인 역할을 하기에 도자주의 양이 철저하게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다.
샴페인 전문가 피터 리엠(Peter Liem)도 도자주의 양에 따라 변화하는 샴페인의 풍미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도자주의 양만 달리 하여 만든 똑같은 셀로스의 싱글 빈야드 샴페인을 마시며 도자주가 0.67g에서 1.33g으로 넘어갈 때 변화하는 과일 풍미의 강도와 복합미, 미네랄리티의 강도에 놀랐다.
얼마 전부터 도자주를 아예 넣지 않는 브뤼 나투르(Brut Nature) 샴페인이 유행이다. 이는 내추럴 와인 등 자연주의에 열광하는 추세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도자주를 넣지 않은 샴페인이 더 맛있거나 훌륭하지는 않다. 피터 리엠이 말한 것처럼 도자주는 '음식에 사용되는 소금'의 역할을 한다. 음식에 따라 필요한 소금의 양이 있으며, 소금이 적절하게 들어가야 음식은 짠 맛을 드러내지 않고 가장 맛있어진다. 이처럼 샴페인마다 가장 잘 어울리는 도자주의 양이 있다.
실제로 자크 셀로스 샴페인은 아주 적은 양의 도자주가 첨가되었는데도 달콤한 맛이 느껴진다. 반면 스위트 샴페인인 익스퀴(Exquise)는 리터당 24g의 당이 들어가는데 당도를 알아채지 못할만큼 달지 않다. 그만큼 샴페인의 균형이 완벽하게 맞추어져 있다. 이쯤되면 그를 샴페인계의 '소금술사'라고 부르고 싶다.
자신이 영어를 잘 못한다고 소개한 안셈씨는 투어 내내 자신의 철학을 전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잘 떠오르지 않는 단어가 있으면 이마를 짚으며 생각하거나 함께한 프랑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문장을 완성했다. 약 1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얼버무리며 넘어가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이런 행동에서 그의 고집스럽고 빈틈없는 모습이 보였다. 작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의 샴페인이 오늘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이유일거라 생각한다. 그로부터 샴페인의 철학 뿐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