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작은 실천

헌혈 이야기

by 수리향

헌혈, 남모를 누군가를 위해 나의 피를 내어주는 행위. 만성 저혈압인 나에게는 다소 거리가 먼 행위였다. 가뜩이나 없는데 여기서 더 덜면 뭔가 손해인 느낌? 작년, 코로나로 혈액 수급에 비상이 걸리고 같은 부서의 선생님이 조심스레 헌혈을 권하는데 그냥 못 이기는 척해보았다. 당시 몸 상태는 딱히 아프지도 않았고 꽤 오랜 기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헌혈 예약을 하고 차를 끌고 빙빙 돌다가 겨우 찾은 헌혈의 집에서 간단한 검사와 문진을 받았다. 검사 결과 헌혈은 가능한데 그해 초에 말라리아 지역에 다녀와서(코로나 직전 다녀온 해외여행이었다.) 전혈은 불가능하고 성분헌혈만 할 수 있다고 한다. 전혈을 하는 옆 자리 남성 분은 10분도 안 돼서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데 나는 한 시간 동안 엄청 큰 기계에서 피가 걸러지는 걸 구경하자니 어느새 피로와 빈혈이 쏟아졌다. 결국 중간에 피 뽑기를 중단하고 휴식을 취한 후 헌혈의 집을 나섰다.


바야흐로 늦봄, 따가운 햇살에 정신이 아찔했다. 비틀비틀 걸어가는데 아까 옆에서 피를 뽑았던 분이 ‘집에 데려다줄까요’ 하고 물어보았다. 빨간 피를 엄청 많이 뽑고 너무나 건강한 모습으로 걷고 있는 남자분을 보자니 뭔가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아직 걸을만한지라 사양하고 겨우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서 휴식을 취한 후 귀가했다. 지금 생각하니 참 바보 같은 것이 원래 헌혈을 할 때에는 차를 운전해서 안 된다. 처음이라서 무지했다지만, 잘못하면 교통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첫 헌혈이 썩 좋은 경험은 아니었던지라 헌혈증도 내팽게치고 다시 헌혈을 하지 않으리 다짐했던 것 같다.




1년 뒤, 다시 헌혈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그리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는데, 바로 내 콜레스테롤 수치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2년 전 건강검진에서 HDL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서 ‘주의’가 떴는데, 올해 건강검진에서는 ‘비해당’이라는 상당히 황당한 문구를 접한 것이다.(나는 ‘정상’이라는 단어를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 당시 건강 관리를 4개월 정도 한 뒤라 건강검진 결과가 모두 좋아서 기쁜 마음이었는데 딱 콜레스테롤 쪽만 알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원래 2년마다 검사 항목이었던 것을 4년 주기로 2019년부터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2년 뒤에 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인데 그러기에는 참 많이 궁금했다. 궁금한 것 못 참는 성격의 나는 병원에 연락을 해보았고 콜레스테롤 검사가 포함된 피검사는 1회에 8만 원이라는 답을 얻었다. 문진과 진료까지 하면 10만 원은 생각해야 하고, 보건소는 코로나 때문에 닫은 상태였다. 알고 보니 건강 검진할 때 2만 원 정도만 추가하면 콜레스테롤 검사도 해준다는데 나는 그런 고오급 정보를 몰라서 8만 원을 날리거나 2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슬픈 상황이….


하지만 찾아보면 다 방법이 있더라. 바로 헌혈. 과제를 하면서 갈고닦은 구글링 실력으로 열심히 찾아보니 헌혈을 하면 엄청나게 많은 피검사를 하게 되고 그 검사 중 추가 검사로 콜레스테롤 검사가 있더라. 올레~! 근데 콜레스테롤 검사는 전혈을 해야 하고 ABO프렌즈라는 멤버십 같은 것도 가입해야 한다고 한다. 가입 기준에 대해서는 그냥 헌혈의 집에 가서 신청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도 있고 1년에 2회는 헌혈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헌혈을 하기로 다짐하고 예약과 준비를 위해 정보를 찾다가 레드 커넥트를 다운로드하였다. 간단한 실명 인증과 함께 가입이 되었고, 기쁘게도 이전 헌혈에 대한 정보와 피검사 결과도 나와 있었다. 알고 보니 열심히 헌혈을 해도 피검사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 피는 폐기 처분된다고 하더라. 다행히 모든 검사 결과가 정상적이었고 부실했던 내 혈액이 그래도 잘 쓰였다는 문구를 보고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콜레스테롤 검사에 상관없이 헌혈을 꼭 하고 말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


올해는 건강도 좋아져서 작년의 굴욕을 씻을 기회이기도 했다.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역시 혈압은 경계선 상이고 혈색소는 정상이지만 전혈은 어려운 수치였다. 마음먹은 이상 빠꾸 먹는 일은 정말 싫었기 때문에 정상을 확실히 넘는 수치로 만들어야 했다. 이건 나에게 무척 불리한 일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붉은 고기 알레르기가 생긴 나는 생선과 계란, 닭고기 조금 정도만 먹을 수 있었다. 게다가 생선과 계란을 좋아하지 않는지라 하루 단백질과 철분 섭취량을 채우기가 항상 버거웠다. 하지만 별 수 있겠는가, 그냥 유튜브에서 계란과 생선으로 할 수 있는 요리 백선을 찾아가며 최대한 열심히 입에 넣었다.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혈색소 검사 결과는 통과였다. 혈압은 90에 딱 걸치기는 했지만 저혈압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문진에서도 통과였는데, 화이자 백신을 일주일 전에 맞은 것 때문에 태클을 받았다. 당시 화이자 2차를 받고 딱 8일이 되는 시점이었는데(백신 맞은 후 7일 후 헌혈이 가능하다.), 항체가 생긴 피는 마냥 좋을 거라 생각했던 나와 달리 문진을 하던 간호사님은 자못 심각하게 백신을 맞은 후 증상에 대해서 질문을 하셨다. 다행히 약도 안 먹고 증상도 없어서 일단 통과는 했는데, 코로나 백신 맞은 후 아팠던 분들은 되도록 헌혈을 늦게 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전혈은 정말 쉽게 끝났다. 주사 바늘이 무식하게 크고 아프긴 하지만 성분헌혈과 달리 확실히 피로감도 덜했고 잼잼하다보니 어느새 쑥쑥 뽑히는 피를 보니 기쁘기까지 했다. 첫 번째 헌혈 때 빈혈이 온 것이 기록이 되어 있던지 간호사 분이 마지막까지 걱정했다가 헌혈 끝나고 침상에서 잘 내려오는 나를 보며 조금 놀라더라. 물론, 헌혈의 집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것’이 목표인 나에게 집에 갈 때까지 끝난 건 아니었다. 첫 번째 헌혈 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지하철 역에서 가장 가까운 헌혈의 집이었고 무엇보다 신기하게도 빈혈 감이 전혀 없어서 순조롭게 귀가했던 것 같다. 저녁을 먹고 다음 날이 되어도 컨디션은 여전히 좋은 상태였다. 다만 움직이지 않던 체중계가 딱 뽑은 피만큼 내려가서 400그램이 줄어 있었다. 몸무게가 하루 만에 이렇게 줄어든 것은 몸에 상당한 무리를 주는 것을 알기에, 8주 동안 헌혈 금지가 왜 붙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전혈 시 피검사 결과. 이렇게 많이 알려주다니...


피검사 결과는 이틀 뒤 레드커넥트 앱을 통해 확인했다. 성분 헌혈과 다른 게 전혈에서는 정말 많은 검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거 하나라도 통과 못하면 피가 버려진다는데, 다 통과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과 내가 건강하다는 증명서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물론 너무 큰 주사 바늘에 상처가 이틀이 지나도록 아물지 않고 밴드 자국 때문에 피부는 짓물렀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전혈에 성공한 내가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원했던 ABO프렌즈 가입은 1년에 2회 헌혈해야 가능하다고 해서 콜레스테롤 검사를 받아볼 수 없었다. 간호사님이 서너 달만 일찍 왔으면 작년 헌혈하고 1년 안 되는 시점이라 가입이 가능했는데 아쉽다며 8주 뒤에 헌혈하러 오라고 말씀하셨다. 헌혈하려면 또 고기 먹으며 몸 관리해야 하는데, 그래서 헌혈 자주 하는 사람들이 건강한 거구나 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2번째 헌혈을 하면 ABO프렌즈 자격이 생긴다.





건강은 흔히 자산이라고 한다. 나는 이 말이 잘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산은 아깝지만 나눌 수 있는데 어떻게 건강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헌혈을 해보니, 나의 건강을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는 행위가 실제 이루어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팠다가 다시 건강해질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건강하다가 쉽게 아팠다를 반복한다. 누군가는 평생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살아갈 때도 있다. 그럴 때의 나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지금의 건강을 조금 덜어서 남겨두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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