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독서

토지

by 수리향

불면증은 아닌데, 이웃집의 비번 까먹었음 코스프레로 일어났다. 미국과 협상하듯 조심스럽게 비번을 눌러대더니 나중에는 문을 부수더라. 아파트 복도가 부서지는 소리에 비몽사몽 깨기 시작해 결국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완전히 잠이 깨서 자리에 앉았다. 수면을 체크하니 그래도 깊은 잠도 램수면도 어느 정도 평타를 쳤다. 수면제 안 먹고 이 정도면. 근데 때만 되면 해대는 이런 오버 짓은 언제까지 하려는지.(한숨)


꿀을 탄 커피가 달달하다. 미적미적 스푼을 돌리며 글을 쓰며 책을 듣는다. 보기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넘어가는 토지는 이제 서희가 손주를 본 것 같다. 매일 출근길에 토지나 대망을 듣는 것이 일종의 루틴인데, 대망은 2년째 보고 있음에도 겨우 1부 끝내고 2부는 (도저히 듣기 힘들어서) 중간쯤 스킵하고 3부를 보고 있고 토지는 이제 끝을 보는 것 같다. 초반에는 최참판댁이 너무 안 풀리고 답답해서 죽을 뻔했는데 서희가 재기해서 복수도 하고 다소 과격한 연애도 하고, 게다가 명희와 인실이 같은 개성 있는 서브 여주들이 나오면서 중반 이후 무척 재미있게 보고 있다.


박경리 작가님이 책을 쓰던 시대가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는 아니지만 여성에 대한 권리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시기에 이렇게 여성 중심의 소설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편인데 어릴 때는 월탄 박종화의 소설을 좋아했다. 지금 보아도 아름답고 섬세한 문체로 남성 중심의 왕실을 주로 배경으로 하는. 토지는 그와 반대로 주인공 세명이 모두 여성이며 사투리가 남무 하는 다소 투박한 문체를 지녔다. 처음에는 전라도 사투리에 익숙지 않았고 뭔가 틀린 것 같은 맞춤법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는데 귀로 들으면 그 사투리가 참 구수하게 잘 들어오더라. 결국 토지는 눈보다는 귀로 더 많이 들은 책이 아닐까 싶다.


토지에서 그리는 여성상은 몰락한 조선의 양반가의 후예인 서희, 고등교육을 받고 사랑 없이 재력가와 결혼한 명희, 일본인과 사랑을 한 인실이 이렇게 3명으로 요약된다. 서희는 전통교육을 받았지만 시세에 밝고 영리하며 자신의 삶에 적극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투자도 잘하고 신분을 따지지 않고 길상이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조준구에 복수도 잘하고 그런 완벽한 인물이다. 사실 서희는 그동안 너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그저 그런데, 중반부터 나오는 명희라는 캐릭터는 정말 매력적이다. 당시 엘리트 여성과 전통적인 여성상이 갈등하는 사회 속에서 명희는 전통적인 남성인 이상현을 사랑하다 결국 포기하고 왕족 집안의 재력가인 조용하의 욕심에 휩쓸려 결혼을 하고 만다. 그리고 펼쳐진 지옥과 이혼, 자살시도, 조용하의 죽음으로 상속자가 되어 유치원을 열게 된다. 소설 속의 명희는 똑똑하고 능력있는 신여성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만 자신의 삶에 수동적이었고 그 대가로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에 실패했다. 물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그럼에도 배움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에 비해 너무 파국을 경험을 해서 그리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보기 어려운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박경리 작가는 당시 엘리트 신여성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인 좌절과 불평등을 명희를 통해 극적으로 연출한 것 같기도 하다. 인실의 경우는 더 심각한데 엄청난 매력으로 여러 남성들을 죄다 홀리면서 하필 일본인 오가타 상을 사랑하게 되어 아이까지 가지게 된다. 오가타도 조선의 여성을 사랑하는 일본인으로서 많은 갈등을 하게 되고, 결국 민족의 비극으로 인해 두 연인은 이어지지 못하고 아이는 조찬하가 맡아 키우게 된다. 인실은 방직공장의 여급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 적극적이기도 한 그런 인물이었는데 그냥 시대에 희생자인 것 같다. 아무튼 잘난 여자들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에 휩쓸려 어떻게 살아가는지 파란만장하게 보여주는데, 행복하게 살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런 굵직한 사건들 사이에 참 여러 사람들과 시대가 맞물려 작용하면서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 같다.


토지에서 남성상은 낮은 신분을 극복하고 서희에게 간택된 길상, 서희와 같은 신분임에도 전통과 로맨스 사이에 매일 방황하다 망가지는 상현이 아닌가 싶다. 길상은 서희와 결혼 후 좀 더 나은 인물이 되기 위해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그 과정에서 높이 성장하며 가족들에게 인정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현은 유서 깊은 양반가의 자제이자 아버지가 독립운동하는 인물이었지만 좋아하던 여자들에 대한 소설이나 쓰며 기생집을 들락 거리다가 기화를 임신시키고 내빼는 무책임한 인물이다. 전통적인 양반가의 자제인만큼 유교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하면서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서희를 잡고 싶은데 잡지도 못하고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혼인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인물이다. 보다 보면 토지에서 가장 암 걸릴 것 같은 인물이 이상현 같다. 나중에 명희에게 고백을 받고서도 비겁하게 내빼며 상처 주고 명희에 대한 소설이나 쓰는…. 유약한 조선의 마지막 남성을 보는 것 같다. 그나마 이상현의 아내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인물이라 집안과 아이들을 혼자 키웠다는 이야기. 어쩌면 강한 여주들과 폭풍 같던 시대상 사이에 갈등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 같다. 하지만 차이점이라면 길상은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싸워왔지만, 상현을 회피하고 여자들 뒤로 숨는 비겁한 인물이었다는 것일까.


그 외에도 참 많은 인물들이 있었고 특히 일제 앞잡이 었던 김두수(거복이)는 동생인 한복이 와 대비되는 참 독특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전형적인 나쁜 놈인 조준구 내외와 달리 그는 그렇게 흑화 될 수밖에 없었던 모습이 잘 그려져 덜 얄미웠던 인물. 하지만 너무 잔인하고 비열하게 그려져서, 모든 일본 앞잡이가 이런가 하는 선입견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본에 붙은 사람 중에는 위에 나왔던 박종화 같은 점잖은 인물도 많고 사실 김두수의 사례는 너무 극단적이 아닌가 싶다. 부모의 죽음으로 최참판댁, 더 나아가 조선에 대한 증오와 열등감에 시달리는 그를 보면서 사람이 에너지를 쏟는 방향에 따라 살아가는 양상이 너무나 달라지는데 그 삶에 대한 책임은 결국 본인이 져야 한다. 물론 올바른 길을 택했다 한들 토지의 모든 인물들은 죽음으로 수렴한다. 그것도 생각보다 빠르게.


그렇게 많은 인간들이 폐망하는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당시 사람이라면 어느 사람쯤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토지는 동학과 독립운동이 주가 되는 소재였지만 모든 인물들이 동학의 일원도 아니고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냥 그 시대에 받을 수 있는 것을 받고, 빼앗기고, 쓰러지며 그냥 살아가는 잡초들이었을 따름이다. 가끔 영웅주의 사관에 기대어 사람들에게 영웅이 되기를 바라는 캠페인을 볼 때마다 너네나 잘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결국 시대를 움직이는 것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인간 군상일뿐이고 영웅을 원하는 그 바람 또한 누군가의 이해관계를 만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그런 건 박종화 소설에서나 찾아볼 수 있지 현실에서는 찾기 어렵고 찾을 필요도 없다. 어쩌면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작은 인간 군상들에 대한 기만이자 책임 전가가 아닐지. 그냥 오늘을 살아가며 핍박받고 살아가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그냥 민초들의 이야기인 토지가 그래서 더 마음속에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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