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셔야 합니다.

원격 수업 대응기, 두 번째 이야기

by 수리향

교무 부장님의 전화를 받고 내 손을 전광석화처럼 빨라졌다. 지금 예산을 신청하지 않으면 영영 필요한 물건을 사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평소에는 엄청난 둔함을 자랑하다가 가끔 이렇게 찾아오는 예민함은 대부분 정답인 경우가 많았다.


'웹캠, 펜타블릿, 헤드셋, 소형 마이크'


모든 반인 36개의 반을 기준으로 꼭 필요한 물건만 넣었는데 800만 원의 예산이 나왔다. 정보부 예산으로는 어려울 것 같고 추경을 하든 다른 과에서 빌려 오든 해야 한다. 나는 PPT로 보고서를 작성한 후 마지막 장에 예산서를 끼워 넣었다. 모든 돈에 관련된 문제는 예민한 편이라 완벽한 계획서나 예산을 세워오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교장실에서 프레젠테이션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김 빠지게도 교무, 연구, 학생부 3대 부장이 모인 주요 부장 회의였다. 원격 수업 때문에 부른 것이 확실한데 이야기는 정해진 메모를 나직하게 보고하는 그냥 보고회였다. 마지막에 원격 수업에 대한 안을 내고 열심히 설명하는데 초장부터 상석에 앉은 언니들이 눈치를 준다.


수첩이 탁탁 거리는 소리, 헛기침 소리, 애꿎은 펜 괴롭히는 소리.


잉, 그렇게 쉽게 끝날 프레젠테이션(?)이 아닌데...


소소한 소음을 무시하며 나는 기어이 마지막 장의 예산 페이지까지 읽었고, 드디어 교장 선생님의 불편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이야기하시죠.'


'지금 사셔야 합니다. 특히 웹캠은 사지 않으면 앞으로 일주일 안에 동이 나서 살 수 없을 겁니다.'


나의 다급한 외침은 더욱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관리자 분의 표정에 묻혔다. 그대로 교장실 밖으로 쫓겨온 나는 내내 무한 눈치를 주었던 교무, 연구 언니들에게 열심히 혼났다. 교장실에서 하는 회의에 처음 참석해서 주요 부장회의가 고리타분한 것이 그날 처음 알았다. 앞으로는 들어갈 일이 없을 것 같은 교장실에서의 호객행위는 실패했지만 본 교무실로 자리를 옮겨 교감 선생님과 부장님들을 모아놓고 강매에 들어갔다.


얼마나 침을 튀겨가며 선전을 했을까, 장소만 옮겼을 뿐인데 홍보효과가 상승해서 웹캠과 마이크를 사는 것에는 다들 호응해주었다. 하지만 다 사지는 못하고 딱 필요한 웹캠과 마이크만 몇 개 사기로 했다. 예산은 급한데로 전문부 예산을 쓰기로 했다. 전문부는 IT소프트웨어, 통신, 전자, IT응용과의 모든 예산을 아우르고 있어서 우리 학교에서 가장 예산 범위가 크다. 그런데 전문부장님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더 예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잘 부탁한다고 하고 다시 내 교무실로 돌아갔다.


그다음 주에 내 예상대로 원격 수업을 한다는 공문이 오기 시작했고, 뉴스에는 시중의 웹캠이 동이 나서 10배로 가격이 뛰었다는 둥 소식이 난무했다. 교육현장은 일대 혼란에 빠진 이때 우리 학교 부장단 단톡 방에서 흐믓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웹캠 다 샀지?'

'그럼요. 지금 배송 오고 있죠?'

'안 샀는데...'


폭탄 발언이 삽시간에 카톡방을 얼어 버렸다. 나는 노란 말풍선을 보며 무음모드로 '오마이갓'을 외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결론은 당시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까지의 모든 예산은 정해진 틀대로 완벽하게 예상되고 집행되었는데 이번 코로나 19 대응 교육에 대한 예산은 졸속으로 처리한 거라 거부감이 있었던 듯도 싶다. 근데 새로운 것을 만드는데 완벽한 매뉴얼과 완벽한 예산안은 없다. 이럴 때야 말로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때인데 오랫동안 공무원으로 행정 업무를 하다 보면 그런 것들이 잘 보이지 않나 보다.


그렇게 웹캠을 살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