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하얗고

마음은 허무가 차고

by 수리향

가끔 삶이 휘청휘청할 때 지친 몸을 이끌고 잠시 밖을 거닌다. 아직 겨울이라 날이 차다. 검푸른 하늘에 흰 초승달이 금성과 목성과 한 줄로 나란히 지고 있었다. 초승달인데 저렇게 얇고 가느다란 초승달은 초저녁에 잠깐 떠서 나도 처음 보았다. 아무리 얇은 달이라도 월광은 무시할 수 없어서, 달빛 앞에도 빛날 수 있는 건 행성 밖에 없다. 가장 밝은 건 금성, 그다음은 목성. 붉은 화성도 오늘 떴다는데 보지 못하고 오리온자리만 보았다. 별 보기에는 하늘이 차고 맑은 겨울이 최적인데 그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초승, 정말 얇게 깎아 놓은 손톱 같다.

하얀 달이 무색하게 약간 허무하고 힘든 하루를 보낸다. 새로 맞춘 컴퓨터는 그래픽 카드를 깜박해서 며칠을 내 속을 까맣게 타게 하다 오늘에야 도착했다. 처음으로 그래픽카드란 것을 끼우는데, 2시간이나 걸렸다. 유튜브에서는 5분도 안 걸리던데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니 놀라고 있다. 앞으로 절대 모든 부품은 컴퓨터 업자를 찾아 끼워달라고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뒤로 다시 OS를 설치하고 그래픽 드라이버를 설치하는데 자동으로 잡히지 않아서 엄청 고전했다. 이번에 산 조립식 PC는 생애 처음으로 맞춘 데스크톱이다. 본체가 있는 PC도 처음이고 그래픽카드도 처음이다. 대학원 때 주력이 그래픽과 머신러닝이었는데 그동안 그래픽카드 하나 없는 노트북으로 공부했다니 나도 참 대단하다. 그래픽 카드 없어도 기다릴 줄만 알면 CPU가 해결해 주어서 프로그램 걸어두고 차 마시고 한 잠자고 일어나 다시 두드리고 그러면서 살았던 것 같다. 졸업 프로젝트할 때는 노트북으로는 택도 없어서 학교 실습실 컴퓨터를 이용했다. 왜 그렇게 없이 살았는지. 좀 일찍 샀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새로 우리 집에 입양된 녀석은 자꾸 나를 잡아당겨 계속 밤을 지새우게 한다. 반짝반짝 새 빛을 내는 녀석을 앞에 두고 도저히 잠이 오지가 않아서 자다가도 몇 번씩 일어나 앉기 일쑤다.


1년 동안 컴퓨터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인지, 펜이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그동안 잠재워져 있던 욕구가 살아난다. 하지만 몸은 그에 따라 주지 않아 잠시 일어서면 풀썩 주저앉는다. 밥을 잘 안 챙겨 먹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코로나 후유증으로 어지럼증이 돋는 것도 같다. 이렇게 해서 결국 뭐 하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요 근래 나를 지배한 허무감은 어떻게 하든 감출 수 없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하는 생각.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따라 잡힐 것 같아서 그런가? 아니 이미 그 녀석은 나보다 잘한다. 수학은 내가 조금 더 잘하지만 곧 따라 잡힐 거고 코딩은 분명히 AI가 더 잘한다. 그 전부터인지 그 후인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한 공부에 짙은 회의가 든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가. 그냥 펑펑 놀 걸 그랬어. 하지만 작년 한 해 놀아보니 뒤통수를 맞아 버린 이 느낌적 느낌. 하지만 또 작년에 죽어라 공부했다면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런 생각들을 한다. 그래픽 카드 하나 제대로 끼우지 못해 버벅거리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과거의 나는 붉은 여왕과 함께 체스판을 뛰고 있었는데 이제는 체스판에 밀려 점점 뒤로 밀려가는 것 같다. 체스판이 너무 빨라진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잠시 쉬어서일까. 둘 다 일 것 같은데 이제 뛰어다닐 체력도 부족하다. 근데 그렇게까지 뛰어서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뛰는가. 허무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