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내내 연수를 받다가 바로 미국 서부 뉴욕-워싱턴-필라델피아를 5일 단발로 다녀와 지쳐 쓰러.. 질 틈도 없이 개학을 맞이하였다. 짧은 시간에 여행을 다녀오다 보니 준비하지 못한 것도 많아 (비자) 사기도 당하고 참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하나님이 보우하사 별 일 없이 잘 다녀온 것 같다. 물론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는지 몸이 힘들지만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참 많은 곳들을 다니고 느끼고 배운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짧지만 굵게 다녀온 미국, 그곳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곳은 자유의 도시였어
‘자유’ 얼마나 달콤한 단어 인가. 하지만 그 단어가 주는 무게와 치열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곳이 미국이 아니었나 싶다. 그곳의 역사는 ’호기심‘에서 시작해 ’개척‘으로 종래에는 ’자유‘로 수렴하는 여정이었다. 한국은 민주주의를 8.15. 해방을 통해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히로시마 원폭으로 인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해 맞이하는 광복이었다. 비록 수많은 이들이 국내와 국외에 흩어져 해방을 위해 고군분투하였지만 잡지 못했던 그것, 자유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져 버렸던 우리의 역사와 달리 이들은 정말 치열하게 싸우고 논의한 끝에 만들어진 것인 만큼 그들이 지닌 자유에 대한 열망과 자부심을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물론 한국은 그 뒤로 제대로 된 자유를 찾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고 그중에 하나인 6.25의 역사도 미국의 워싱턴 참전용사비에서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인천에서 종종 인천상륙작전의 맥아더 장군 동상을 보는데, 미국에서도 참전용사비를 보는 느낌은, 뭐랄까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것 같다.
이 비석에서 가장 많은 이름은, Lee, Kim, Park, … 한국의 이름들이었다. 그 익숙한 이름들에, 우리도 자유를 위해 정말 많은 피를 흘렸구나, 그것이 정말 공짜가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갑자기 날아든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분단된 우리와 달리 그들은 카펜터스 홀에서 치열하게 논의를 하고 인디펜던스 홀에서 자유의 헌법을 만들어내었다. 그것이 참 부러운 것이, 단순히 자유를 행복을 글로 적은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이해하고 실현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것에 기꺼이 사인하고 헌신할 수 있는 이들이 그 당시 사회의 지도층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권력과 자유를 사유화하는 것에 사인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만인들이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문서를 만들고 사인을 하였다. 그들은 이제 거인이 되어 미국의 자유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보며 이념의 현실화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대망의 ‘료마가 간다’ 편에서 사카모토 료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미국에선 대통령이 하녀라 할지라도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생각하며 정치를 한다
단순히 세습 정치를 하는 도쿠가와막부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지배자와 권력자들이 자신의 땅과 부귀를 위해 노력하지 말고 가장 낮은 곳까지 선한 영향을 미쳐야 하는 것이 정치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결국 대정봉환을 성사시켜 일본을 개화하였다. 물론 개화가 아름다운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자유라는 것은 소수 권력자의 자유가 아닌 만인을 위한 자유와 행복이라는 점에서 당시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료마가 ‘대통령’ 제를 무척 부러워하였는데 사실 대통령과 왕 사이에는 ‘임기’ 말고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지 않고 임기를 무제한 이어 간다면 그건 사실상 왕정, 나아가 독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가장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자신의 권한을 내려놓고 자유인으로 돌아간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미련 없이 내려올 수 있는 그 용기야 말로 미국인들이 말하는 쿨 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쉽게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면서 (부조리도 있지만) 참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인간의 탐욕에 반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피 흘린 이들이 있어 현재의 내가 이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물론 그 자유가 모두 완벽하게 누리는 자유는 아닐 것이다. 필라델피아의 인디펜던스 홀에서 만난 미국인들이 모두 백인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쩌면 자유에 대해 받는 느낌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동부에서 남부에서 자유의 종을 보러 온 이들처럼 그들이 그 가치를 얼마나 깊이 존중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아름다운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 가기 전부터 사기를 당했듯이 미국의 ‘자유’는 자칫 방종으로 흐를 수 있고 개인의 양심과 선함에 기대는 경우가 많은데 시민성이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같은 정도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좋은 모습만을 볼 수는 없다. 미국에서 만난 어두운 면은 높은 물가와 노숙자였다. 특히 가장 기본적인 식료품들이 뉴욕에서 비싸기 때문에 저소득층이 살아가기 사실상 어려운 도시 같았다. 중국에서는 기본적인 과일이나 쌀, 빵, 밀의 가격이 무척 저렴하기 때문에 소득이 적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음식뿐 아니라 숙박 물가도 살인적이라서 (대도시라 그런 것인지) 서민들이 살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요즘 먹는 물가가 참 많이 오르고 있는데 중국처럼 물가를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물가를 잡는 것이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알들을 한 바구니에 담으면 어떻게 될까?
다양한 문화, 다양한 인종, 다양한 언어 그것들이 한 바구니에 모여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달러와 하나의 도시에서 생활하는 곳이 바로 미국이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면 너무나 당연히 같은 얼굴색과 같은 머리 색의 사람들만 만나고 비슷한 체구에 비슷한 문화를 공유한 ‘한민족’이라는 공동체를 만들기 때문에 다른 피부색의 사람만 보아도 너무나 눈에 확 뜨이는 부작용이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정말 다양한 색의 피부들이 전혀 위화감 없이 섞여 있었고 허드슨 강이 흐르듯 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많은 이들이 모여 다양한 소리를 내고 섞이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을 것이 아닐까. 바구니를 걸어 잠그고 다양한 알들을 하나의 알로 바꾸는 것은 이제 와서 별 의미 없는 소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그들은 자유의 맛을 알고 그곳에서 생존해 온 알들인데 다른 곳에서 부화하면 그건 미국의 독수리가 아닐 것 같다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남은 달러를 환전하였는데 1달러, 5달러, 10달러, 20달러는 하나씩은 기념으로 남겨두었다. 달러를 곱게 펼쳐 해리포터 책에 넣어 두었는데 20달러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내 돈…) 요즘은 카드를 주로 사용해서 이제 미국에서도 지폐를 보는 건 쉽지 않지만 그래도 지폐는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지표 같다. 가장 흔한 1달러와 5달러에 워싱턴과 링컨의 모습을 세긴 것은 그들이 희생해 왔던 것들 그리고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언제나 가슴 한 켠에 지니고 있자는 의미가 아닐까? 좋은 가치는 바다를 건너도 닳지 않고 빛나는 것이니 한국에서도 잘 기억해 보아야지. 물론 그전에 좀 쉬고 싶다..(내 방학 돌리도!)
나의 미국 여행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