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샤의 모로코 여행기
“파라샤!”저 멀리서 K가 외치며 손을 흔든다. 낯설고 반가운 이름 파라샤. 얼마만인지 모를만큼 오랜만이라 그 이름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보려 애썼다. 꽤 깊은 곳의 기억까지 더듬어야했다. 파랴사 라는 이름의 주인은 바로 나다. 모로코에서 지내는 동안 사용했던 아랍어 이름이다. 한국으로 돌아와선 도무지 그렇게 불릴 일이 없는 통에 까마득 잊고 지냈던 터였다. 잊고 지낸 나의 이름이 다시금 모로코에서의 추억을 환기시킨다.
바야흐로 2017년, 미용 대학을 다니던 때였다. 당시의 나는 졸업 전시 작품 준비와 졸업 후 진로 방향을 잡느라 꽤 골치 아픈 시간을 겪고 있었다. 이 골치 아픈 시간보다도 이 시간 너머의 불안정한 앞날과 무료할 게 뻔한 앞으로의 삶이 더 답답할 뿐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재밌는 삶일까‘를 수도 없이 고민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졸업 전시 작품을 돕던 담당 교수님께서 해외봉사단이라는 흥미로운 키워드를 넌지시 던졌고, 며칠 후 학교 강당에서 봉사단 모집 설명회가 있을 거라는 정보를 주셨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이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가 해당 봉사단에 대한 정보를 있는 대로 찾아보며 흥미를 증폭시켰다. 낯선 땅에서 살아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 삶을 재밌게 만드는 일이 분명해.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곧이어 학교에서 열린 해외봉사단 모집 설명회에서 얻은 구체적이고 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대를 단단히 채우고 말았다.
봉사단 준비는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치 온 우주가 나를 봉사단원으로 보내려고 작정한 듯이 유연하고 쉽게 말이다. 몇 가지 서류 준비와 자기소개서 작성 그리고 최종 면접까지. 무엇하나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졸업 작품 전시회가 마무리되고, 곧바로 아프리카 모로코라는 나라의 미용 봉사 단원으로 발탁되었다. 대학교 졸업 직후인 2018년 2월 말부터 5월 초까지는 봉사 단원으로서, 해외 파견 전 양재에 있는 국내 교육원에서 두 달 동안 합숙을 했다.
국내 합숙 중에는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봉사단 규정과 청렴 실천 윤리, 개발 협력 이슈 등 그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교육은 단연 모로코어 바로 ‘데리자’ 수업이었다. 문자가 없는 데리자 라는 모로코식 아랍어를 배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구불구불 그림 같은 전통 아랍어 알파벳을 외우고 문자가 없는 데리자에 전통 아랍어 문자를 소리만 맞춰 단어를 만든 뒤 겨우 쓰고 외워야 했다. 그렇게 힘들게 배운 모로코어지만 이제는 상당 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모로코어 선생님이 지어주신 모로코 이름만은 꼭 기억하고 있다. 아마 평생을 기억할 듯싶다. 나의 한국 이름의 뜻이 가장 빼어난 나비 라고 말하니, 선생님은 그에 맞춰 ‘나비’라는 의미를 가진 아랍어 ‘Farasha’를 이름으로 지어 주셨다. 의미 있는 뜻은 물론, 부드럽게 굴려지는 혀와 시원하게 내뱉어지는 음성이 아주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그 매혹적인 이름 덕분에 나는 낯선 모로코 사람들과 인사할 때면 아주 기분 좋게 외쳤다. 내 이름은 파라샤야!. 그럼, 사람들은 파라샤! 외치며 똑같이 크게 웃어주고는 했다. 이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모로코 사람들에게 내 이름은 나비야! 라고 소개하는 작고 왜소한 동양 소녀의 모습이 얼마나 우습고 재밌었을까 싶다.
앞의 이야기만 보자면 나의 모로코 생활도 순탄했으리라 예상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낯선 곳에서 적응하기란 어려운 일투성이였다. 특히 모로코에 막 파견된 2018년 5월은 결코 잊을 수 없다. 한국에서 프랑스까지 8시간 그리고 프랑스에서 모로코까지 4시간. 최종 비행시간만 12시간이 걸려 도착한 모로코 공항은 불이 죄 꺼져 컴컴하고 텅 비어 공포감만이 가득했다. 고작 두 세 명의 공항 직원과 우리를 마중 나와 준 현지 직원 두 분뿐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그럴까 싶지만, 그래도 엄연한 국제공항인데 이럴 수 있을까. 강렬한 첫인상을 선사해준 모로코는 특히 이유가 있었다. 우리 봉사단원들이 도착한 5월 18일부터 ‘라마단’이 시작한 것이었다.
‘라마단’이란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 금식을 하며 기도를 하는 이슬람의 문화인데 무려 한 달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는 물론 물까지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단 몇 시간을 금식하기도 힘들 터인데, 무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금식이라니. 하물며 이 고생을 한 달이나 해야 한다니. 비단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담을 끼얹자면 기독교인 나로서는, 나의 믿음에 대하여 고찰해보게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하였다.
모로코에서 라마단에 동참하지 않는 비 이슬람교인으로서 라마단 기간을 버티는 일은 또 다른 고충이 있었다. 바로 웬만한 로컬 식당이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 어학원 레지던스에서 지내며 매 식사를 알아서 해결해야 했던 우리에게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갈 수 없는 것은 큰 문제였다. 가지고 있는 식자재도 없을뿐더러, 조리를 할 수 있는 적당한 주방도 구비되어 있지 않은 현실이었다. 겨우 문을 여는 맥도날드나 타코집 같은 곳들을 전전하며 어려운 식사를 해야했다. 끼니 해결 외에도 나열하기 비참할 만큼 어려운 일들이 수두룩했었다.
하지만 마냥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좋은 일이 3번 일어나면, 안 좋은 일이 1번 일어난다는 법칙을 들은 적이 있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면 안 좋은 일 하나를 겪었다면 이제 좋은 일 3가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라마단 기간이 끝나자 모로코 생활은 활기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즐거운 순간들이 줄을 지었다. 그 중 첫 번째로는 뜨거운 볕을 맘껏 쬐며 건강하게 자라난 과일들을 저렴한 가격에 잔뜩 먹을 수 있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6월부터는 과일 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기분 좋은 과일 향이 그득그득 했었다. 특히 살구의 시큼 달큼한 향이 발걸음을 멈춰 세우곤 했었다. 일 킬로에 천오백 원 즈음. 한 봉지 잔뜩 사 와서 시원한 물에 헹구고, 살구를 보드란 껍질 그대로 앙 베어 물면 과즙이 팡 하고 터져 나와 더운 기운을 금방 날려주곤 했다. 한국의 살구가 가진 달큼함은 과연 비비지도 못할 모로코 살구의 달큼함이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한다. 이는 모로코에 또다시 가고 싶은 이유를 말할 때 살구를 가장 먼저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모로코 라바트에 위치한 우다야 해변에서 서핑을 한 것이다. 난생처음 서핑을 모로코에서 한 것인데, 알고보니 많은 서퍼들이 모로코에서의 서핑을 꿈 꾼다고 한다. 높고 힘있는 파도가 가장 큰 메리트라고 하던데, 막상 서핑 애송이가 느끼기엔 온 몸이 바스라질 것 같을 뿐이었다. 서핑 샵에서 서핑수트와 보드를 대여하고, 2시간 정도 서핑 강사님의 수업을 들었다. 이후 본격 바다에 나가 파도를 읽고 몸을 보드에 싣는 과정은 실로 처참했다. 내 몸이지만 내 것이 아닌 기분. 사방에서 파도가 때리는데 무작정 버텨내기란 쉽지 않았다. 제 몸 하나 버텨내기 어려운 와중에 모로코 꼬마아이들이 짓궂은 장난마저 걸어왔다. 우리가 탄 서핑 보드를 밀거나, 보드에 달린 레그 로프를 잡아당기는 데 정말 꿀밤 몇 대 쥐어박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바다에 있는 내내 나는 실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드에 맞아도, 파도에 휩쓸려도, 꼬마 아이들의 장난에도 그저 웃고만 있었는데, 이는 바다가 주는 에너지 덕분이었다. 바다에 있자니 도통 지치질 않는 것이었다. 모로코에서 비로소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나는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서핑을 잘 못 타고, 심지어는 수영도 못 하지만 바다를 좋아한다니. 지구 반대편 까지 와서야 나는 나에 대해 알아가는 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세 번째는 줄곧 모로코 수도 라바트에서만 지내다가, 드디어 다른 도시를 여행 한 일이다. 어학원 프로그램으로, 모로코의 최북단 탕제와 일명 파란 도시라 불리는 셰프샤우엔을 여행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할 줄 몰랐던 내가, 모로코에서의 여행으로 인해 확실히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스케줄은 다소 타이트하여 효도 관광 여행처럼 도착점을 찍자마자 다음 목적지로 출발하는 여정이었음에도 말이다. 어떻게 이런 여행을 경험하고서도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 의문에 답변은 이렇다. 좋은 여행 메이트가 있다면 어디를 여행하든, 며칠 혹은 몇 시간을 여행하든 메리트가 큰 여행을 만들 수 있더란 것이다. 나에게 좋은 메이트는 카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