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순간 이전에는 항상 최고의 순간이 있었다.
누구나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최악의 순간이 있다. 이기적인 걸 알지만 멈추지 않았던 순간들, 홧김에 내뱉은 말들, 사랑과 정에 기대어 무책임하게 굴었던 날들. 최악의 순간들은 당시 나의 주변인들을 힘들게 했을 것이다. 그들 앞에 서면 나는 무력해진다. 머릿속에 있는지도 몰랐던 말들을 술술 내뱉기도 한다. 마치 열 살 쯤 되는 아이가 관심 좀 달라고 부모를 못 살게 구는 것처럼.
최악의 순간 이전에는 항상 최고의 순간이 있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무음이다. 주위의 소음이 뭉개져 귀 주변을 맴돌다 흩어진다. 둘 사이는 전류가 흐르는 것 마냥 짜릿하다. 비로소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 구름이 날 떠받치고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것 같은 느낌. 오로지 나의 모든 것을 보이고 싶은 욕망에 무언가가 뇌에서 터져나온다. 이내 모든 감각이 마비되고 두 눈의 시력만 남아 눈 앞의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확실히 서로만을 향했던 감각은 현실로 돌아와 비로소 균형을 되찾는다. 강렬한 시선만이 남았던 때는 지나간다. 세상의 소음과 일상의 냄새가 다시 느껴진다. 나조차 모르게,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악의 순간을 보일 준비를 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핑계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때로는 짙은 바다와도 같은 이해심을 요구한다.
나는 나에게도 최악이 된다. 때로는 나의 자아를 멀리 두고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나'가 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이건 너를 위한 내가 아니라고. 나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한다. 갈등과 혼란은 생채기를 남긴다. 이 기분 나쁜 오늘 덕분에 내일은 덜 최악인 나로서 너를, 나를 마주할 수 있다.
사랑은 가만히 서서 변화를 기대하는 것보다 직접 나서 내 길을 주도하겠다는 의지의 감정이다. 사랑과 연애는 둘이 하는 파티플레이 게임이지만 결국 레벨 업은 각자의 몫이다.
서로의 최악을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를 맺어본 것은 큰 행운이다. '너가 없는 나는 상상할 수 없어'라는 흔한 말은 정확했다. 그는 나의 일부였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나는 그와 함께 나의 최악과 그의 최악을 마주했다. 함께 고민하고 각자 선택하고, 스스로 변한 것이 지금의 나다. 그 과정에서 우린 서로에게 고마움을, 연민을, 사랑을 느꼈다. 우린 이제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지만, 그도 나의 일부를 갖고 잘 걸어나가고 있을 거다.
미래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나는 미래의 나를 기대한다. 모든 것을 기꺼이 맞겠다. 최악이어도 괜찮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되니까. 그 끝엔 최선의 내가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