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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ne Sep 06. 2024

Aftersun, 해가 지고 나서

애프터썬 영화 리뷰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런 방식으로 추억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사건은 같아도, 기억은 저마다 다르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과거는 곧이곧대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나의 지향성이 만들어낸 왜곡이 과거의 사건을 휘게 하고, 그것이 나의 기억이 된다. 이 영화는 어른 소피의 회상이다. 아버지의 심상치 않은 상태를 눈치채기엔 너무 어렸던 소피가, 그를 어른이 되어서야 이해해보려고 하는 노력의 과정이다. 


영화가 끝났을 때 가슴이 묵직하게 저려서 혼났다. 이유 모를 눈물이 눈에 고였다. 그 감정이 소피를 향한 눈물인지, 아버지를 향한 눈물인지도 말할 수 없었다. 마치 아버지와 소피 각자의 이야기에 셀로판지가 하나 덧대져 나의 이야기로 보이는 듯했다.



나는 이따금 사랑하는 사람이 혼자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엄마가 혼자에게는 넓을 그 집에서 무얼 하며 조용한 하루를 보내는지, 힘들어 보이는 친구가 집에 돌아가 어떻게 하루를 마무리할지. 나의 상상은 대체로 어둡다. 즉, 나는 일어나지 않은 나만의 왜곡된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 상상의 결과는 대체로 나의 역할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내가 어떤 영향을 미쳐 그들의 우울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낮춰줄 수 있을까? 일어나지 않았을 일에 대해 나의 역할을 고민하는 건 정말 터무니없지만, 나에게는 가장 현실적인 고민이다.


우울할지도 모를 이에게 손을 뻗어 닿고 싶은 건 그들이 우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나의 기초적인 소망 외에도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다. 그들에게 손을 뻗으면 나는 편안해진다.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는 자기만족적 위안이다. 결국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과거를 후회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뒤끝 없는 성격은 장점이지만, 실로 과거를 회피하기도 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범위를 상상하는 것은 괴롭다. 그 면에서 이 영화는 나에게 너무 고통스러웠고, 후회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가득한 덩어리였다. 하지만 외면하고 있던(혹은 보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영화로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이 영화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뛰어나게 보여주고 있다. 말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한편으로 소피의 고민상담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고 기억하는 우리의 모습은 이거였는데, 이게 맞는 것인지. 내가 놓친 것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기억은 오래되어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럴 때 보통 믿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조언과 위로를 얻지 않나. 감독은 영화 상영의 방식으로 소피의 고민을 셀 수 없는 관객에게 털어놓은 것 같다. 


아버지의 의중을 알았다면 소피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소피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린 딸이었을 뿐이니까. 어른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다. 보지 못한 것은 가장 슬픈 것이다. 나는 나를 보낸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기 싫다. 상상조차 하기 무섭다. 그 등을 현재에서 붙잡을 수 있다면, 나에겐 붙잡을 용기가 있을까. 붙잡고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은 있을까.


나는 지금도 과거를 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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