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엄마와 남해를 여행했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남자친구 이야기를 해줬다. 그 당시 나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엄마는 보기 드물 정도로 크게 놀라며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그 친구에 대해 할 이야기는 얼마 없었다. 시간이 십 년은 더 지나서 기억이 희미했기도 하고, 실제로 쌓은 추억도 얼마 없었다. 둘이 함께 했던 귀여운 데이트보다는 내가 그때 가졌던 용기와 수줍음이 주로 떠올랐다.
놀라운 건, 나에게도 희미한 기억이 도리어 엄마에게 남아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중학교 3학년 겨울이었다. 나 혼자 그 남자아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농구도 잘하고, 짓궂지 않고 착한 같은 반 남자아이였다. 키도 170cm 후반 정도로 기억할 만큼 크고, 등판도 넓었다. 짙은 눈썹에 웃을 때 눈이 반달처럼 휘던 모습이 생각난다. 하여튼, 날이 갈수록 중학생의 몸으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내 마음이 커지고 있었다. 조금씩 새어 나온 마음은 최측근 친구들에게만 밝히며 덜어내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생일이었다. 11월의 어느 겨울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나가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 친구가 나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며 다가왔다. 손으로는 귤 한 봉지를 꼭 쥐고 있었다. 고맙다고 말하기도 전에 그 친구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손에 들고 있던 귤 한 봉지를 나한테 쥐어주고 뒷문 밖으로 도망갔다. 반에 있던 친구들은 난리가 났다. 남자 친구들은 그 친구를 놀리러 헐레벌떡 입이 귀에 걸려선 뛰어 나갔고, 여자 친구들은 솟아오르는 광대를 감추지 않고 내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기 시작했다.
내 첫사랑의 기억이다. 이 이야기를 엄마한테 해주고 십 분이 지났나, 엄마가 불현듯 말했다. '아! 그때 귤이 그거였구나. 네가 귤을 안 먹잖아.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친구가 줬다면서 집으로 귤 한 봉지를 들고 온 거야. 아니, 얘는 귤도 안 먹으면서 어디서 귤을 받아왔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 그 귤 봉지가 그거였구나.'
그랬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귤을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준 귤이 맛있었는지, 심지어 먹었는지 조차 기억이 안 난다. 그저 귤 한 봉지의 귀여운 묵직함이 맨질맨질하게 가슴에 남아있을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흥수는 재희를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나인 채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준 내 20대의 외장하드". 나의 10대를 기억하는 외장하드는 당연하게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들, 그리고 의외로 혹은 당연하게도 우리 엄마였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고 얼마 전에 있었던 이 일화가 떠올랐다. 나의 십 대 시절, 나의 성장을 엄마는 가장 가까이서 때론 멀리서 쭉 지켜보고 있었다.
내 소중한 20대의 외장하드는 누구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친구 몇 명이 있다. 어쩌면 나보다 날 더 잘 알 것 같은 너희. 스무 살의 허세와 시니컬해 보이려고 애썼던 찌질함, 촌스러운 옷차림까지 다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너희. 쪽팔렸던 시기를 지나 함께 어른이 되어가려고 애쓰는 시기를 함께 보내고 있는 소중한 너희들. 이 친구들 앞에선 더없이 솔직해진다.
다음으로는 7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했던 나의 전 남자친구도 생각난다. 가장 솔직하기 두려웠지만 솔직할 수밖에 없었던, 거짓말탐지기 기능을 탑재한 고성능 외장하드다. 가장 강렬했던 순간들은 모두 그와 함께한 순간이었다. 이 영화 마지막 대사를 듣고 눈물이 고일 틈도 없이 흘러내린 이유다. 그는 나의 시절을 가졌다. 슬픔보단 그런 외장하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튼튼하게 어딘가에서 잘 살아가고 있을 생각이 들어 마음 한편이 든든했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도 그의 오랜 시절을 담은 소중한 외장하드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무수한 관계 속에서의 스스로의 가치를 느꼈다.
나도 주위 사람들의 모습을 봐주고, 함께 걸어가고 있는 소중한 외장하드구나. 사람들은 그렇게 시절을 함께하는 것이구나. 친밀감의 정도와 상관없이 회사 동료부터 친구 그리고 가족까지, 모두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지금 당신을 기억하고 있는 외장하드는 누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