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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ne Nov 13. 2024

영화 아노라 리뷰: 치부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본 리뷰는 영화 후반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분명 결백했다. 그 결백이 언제나 흰 손수건은 아니었다. 빨간 반점이 군데군데 뚝뚝 떨어져 보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빨갛게 물든 손수건에 색 바랜 반점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점을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누군가 나의 전개도를 훤히 보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는 이미 접힌 종이 주사위처럼 내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접힌 것인지 다 알고 있다는 그 느낌 말이다. 알고서도 묵묵히 내 옆에 있는 누군가를 부수고 싶다가도 안고 싶었다. 세상에서 사라져 달라고 소리치다가도 제발 너 하나만큼은 남아달라고 빌고 싶었다.


영화 <아노라>는 애니(아노라)와 이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시작된다. 애니는 뉴욕의 스트립 댄서다. 영화는 초반부에서 애니의 노동 환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애니는 거침없이 움직이고, 당당하게 돈을 받는다. 러시아에서 온 재벌 손님 이반과 따로 만남을 가질 때도 ‘시간당’ 지불을 요구한다. 일주일간 독점 만남을 제안하는 이반에게 제시한 돈보다 더 높은 금액을 부르기도 한다.



애니와 이반은 곧 서로를 도피처로 여긴다. 애니는 시끄럽고 가난한 집과 클럽에서 벗어나 이반의 호화로운 저택에 일주일간 머물렀다. 이반은 억압적인 가족으로부터 늘 그랬듯이 성과 마약에 도취되어 살아가고, 그 중심에 애니를 놓았다. 기어코 둘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충동적으로 결혼을 서약한다. 주야장천 둘은 서로를 유흥과 일탈 그 이상, 그 이하로 여기지 않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일탈은 그들에게 일상이었다. 그 와중에도 의외인 것은 애니가 돈을 노리고 결혼하는 전형적이고 지루한 캐릭터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자연스럽게 사랑을 강조하지도, 천시하지도 않는 모습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 같이 보인다. 그런 모습으로 애니는 이반이 선물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고급 퍼 재킷을 걸친다.


영화를 한층 사랑스럽게 만든 바보 3인방


곧 러시아에 있는 이반의 무시무시한 부모님은 아들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된다. 이반을 잡으러 깍두기 형님들이 이반의 집(정확히는, 이반 부모님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중 가장 조용하고 서툴러 보이는 이고르가 애니를 붙잡고, 소동 사이에 이반은 도주한다. 이고르와 애니의 케미스트리는 여기서 시작된다. 우스꽝스럽게 섹슈얼한 자세로 이고르는 애니를 결박하며 서로를 어쩔 줄 몰라한다. 애니의 가장 큰 무기로 묘사된 섹스어필이 전혀 통하지 않고 도리어 코믹한 장면으로 연출되는 천재적인 장면이다. 이고르는 이반을 찾는 내내 애니의 곁에 머물며 묵묵히 그녀를 의식한다. 영화의 종반부에 이르기까지 이고르는 변두리에 머문다. 애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2주밖에 되지 않은 이반과의 사랑을 둘만의 순수한 사랑으로 포장하며 시치미 뗀다. 이고르는 결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본다.



애니는 이혼 무효화에 협조하면 거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애니는 이반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레 돈에 의해 움직였다. 의외로 이반을 잡아낸 뒤, 애니는 순순히 이혼에 협조하지 않는다. 약과 술에 취한 이반에게 이혼하지 말자고 매달리고, 판사 앞에서 침착하게 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애니의 이런 행동은 마지막에 와서 돈 대신 사랑을 택하는 것이 절대 아닐 것이라고 본다. 애니는 이반과의 이혼을 스스로 방해하면서도 이 별 거 없는 저항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해진 결말로 걸어갈 수밖에 없지만 그 길을 본인이 원하는 가면을 쓰고 걷고 싶은 애니의 마음이 느껴질 뿐이다.



그런 적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원하는 만큼 눈물이 흐르지 않아 남몰래 눈에 힘을 더 주어 얼마 없는 눈물을 눈에서 비련하게 툭 떨어뜨리려 노력했다. 그때 내게 순수란 어쩌면 다 말라버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결백을 믿어달라고 주장하며 나 스스로도 나의 결백을 믿지 못했다. 이런 나의 못난 마음이 모여 내 치부가 됐다. 난 한편으로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기도 하다. 꽁꽁 숨기고 싶은 내 치부, 그것만큼은 정말 이 세상 누구도 몰랐으면 좋겠다가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것을 알아주는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있어주길 바랐다. 나는 그 단 한 명에게 닿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종반부, 이고르와 애니만 남겨진 대저택에서는 묘한 편안함이 흐른다. 서로를 동족으로 알아보는 자들이 느끼고 있는 동질감이 둘 사이에서 흐른다. 이고르는 낡고 흔들리는 차를 타고 애니를 지하철 소음 가득한 집 앞에 데려다준다. 애니는 말한다. “이 차는 당신을 닮았어.". 이고르는 말한다. "애니보다 아노라가 좋다"라고. 둘은 하나가 되고 아노라는 이고르를 미워한다. 그리고 이내 그 품에 안겨 운다.


겨울에 본 영화가 대체로 기억에 오래 남는 듯하다. 새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길목, 차 안에서 서로를 확인한 아노라와 이고르의 존재가 오랫동안 내 안에 남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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