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두 눈과 귀가 소용 없어지는 때가 한 번씩은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청각과 시각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상태, 그것은 사랑이라 부르기도 하고 콩깍지라 부르기도 하는 축복이자 저주다.
우리 둘 사이에 있는, 남들에게는 없다고 믿는, 이 유일무이한 사랑이 문제다. 사랑은 모든 문제를 핑크빛 미래로 향하는 길에 놓인 장애물로만 보이게 한다. 특히나 오래 사귄 연인의 경우, 상대방이 내게 여태껏 보여준 신뢰와 시간을 믿어보기도 한다.
그 믿음이 결국 사랑도, 상대방도 아닌 나를 향한 것임을 문득 깨닫는 순간이 온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쨍하게 그렸던 미래가 조금씩 희미해져 갈 때. 우리 둘만이 쌓아 올린 유일한 사랑을 믿고 두 눈을 꾹 감고 머릿속을 새까맣게 칠했던 밤들. 그 밤엔 절박하게 머릿속 도화지에 사랑이라는 글자를 볼펜으로 꾹꾹 여러 번 겹쳐 썼다. 이윽고 사랑이라는 글자 대신 알아볼 수 없는 검은 얼룩만 종이에 가득할 때까지.
나는 나를 믿고 싶었다. 나의 감정과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받고 싶었다. 그 증명은 상대방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욕심을 부리기도 했었다. 내가 그리는 미래와 나의 바람, 나의 희망이 너의 것과 같은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나처럼 이성적인 사람의 판단은 틀릴 리 없다고, 이건 기승전결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스스로 세뇌하기도 했다. 사랑은 종교처럼 너를, 그다음엔 우리가 쌓아 올린 시간과 추억을, 마지막엔 나를 맹목적으로 믿게 한다.
결국 나도 틀렸음을 인정하는 때가 온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사랑을 믿는다. 지난 수년간 셀 수 없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덧쓴 종이 위엔 글자로 보이지도 않는 형체만 남았지만, 필압을 견디지 못하고 도화지 군데군데가 찢어졌지만, 다음 장으로 넘겨야 할 때가 분명 오겠지. 다음 장은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 채워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