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같은 길을 걷지만, 서로 다른 세계를 듣는다는 것

by soosays

매일 오전,
나는 어르신과 함께 공원을 세 바퀴 돈다.
오늘의 목표는 사천 보.


어르신이 정하신 그 완강한 목표를 위해
나는 기꺼이 나의 보폭을 그에게 맞춘다.
하늘이 흐릿하더니
이내 비 소식이 들려왔다.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다.
걷다 보니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토독토독’
귓가를 간지럽혔다.


오랜만에 듣는 빗소리에
메말랐던 마음이 괜히 말랑해졌다.
혼자 듣기 아까운 마음에
어르신께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어르신,
비 소리 들으니 참 좋지요?
오랜만에 비가 오네요.”
어르신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앞만 보고 걸으셨다.


그러다 이내
짧고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안 들린다.”
“나인테는 빗소리 안 들린다.”


아차 싶었다.
어르신은 귀 옆에서 크게 소리쳐야
겨우 내 목소리를 알아들으신다.
내 목소리보다 훨씬 작고 섬세한
이 빗소리가


노쇠한 그의 고막에 닿을 리 없었다.


순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어르신이 듣는 세상은
얼마나 조용할까.
나에게는 이렇게 선명하게 들리는
생의 소리들이,
그에게는 아무런 진동도 없는
무성영화처럼
지나가고 있겠구나.
우리는 같은 길을
나란히 걷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세계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새소리도, 빗소리도,
나뭇잎이 서로의 몸을 부비는 소리조차
닿지 않는 적막한 세계.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적막함 속에서
매일 묵묵히 걸음을 내딛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오히려 내 마음은
조금 더 단단해졌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걷는다’는 행위만이
고요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나는 다시
그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발을 뗐다.
비록 빗소리는
함께 들을 수 없어도,


젖은 흙내음과 함께 걷는
이 온기만큼은
오롯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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