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매스케치 번외편 - 작가 소개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시간을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억이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림 그리는걸 좋아했다. 엄마랑 어릴 때부터 함께 이것저것 만들고 그림 그리던 기억이나 미술관을 다니던 기억이 얼핏 얼핏 남아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혹은 국민학교 시절부터..) 미술에 소질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3학년 때 친한 친구랑 같이 동네 화실 다니기 시작했는데, 학교에서 상도 많이 받았고 학교 대표로 미술대회도 나갔다. 화실 다니던 친구들이 예중을 준비하고 있어서 나도 그러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주변에서도 예중 가라고 권했다.
6학년이 되었을 때 어느 날 엄마 아빠가 나를 부르고는 진지한 얼굴로 나는 예중에 갈 수 없다고 얘기했다. 당시 공무원이었던 아빠, 시간강사였던 엄마는 딸을 예중 보내기에 너무 부담이었나 보다. 우리는 널 예중 보낼 처지가 안된다고 했다. 부양할 자신이 없다고.
어릴 때는 내가 좋아하고 잘하면 뭐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온갖 꿈을 꿨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현실의 벽에 조금 좌절했던 거 같다.
내가 원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닫고 충격받았다.
그땐 부모님이 조금 원망스러웠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자식에게 그런 말을 해야 했던 부모님 속도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학교를 올라가며 우리 집은 이사를 갔고 자연스럽게 화실을 그만두게 되었고 새로 이사 간 동네에서 굳이 새로 다닐 화실을 찾아보지 않았다. 난 그냥 반에 한둘 있는 미술 시간에 그림 잘 그리는 애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평범하게 인문계 고등학교를 입학했고 어떤 대학에서 어떤 전공을 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막연했었다.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림 그리는 건 좋아했지만 취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미대는 선택지에도 없었다.
1학년 때 동아리를 들었는데 정말 뜬금없게 힙합 동아리를 들었다. 이유는 그냥.. 동아리 소개를 왔던 고3 오빠들이 키 크고 멋있어서(;;;) 막상 들긴 했는데 랩도 못하고 춤도 못 춰서 어쩌나 했는데 그래피티 파트가 있었다. 오 너무 멋져. 냉큼 난 그래피티를 한다고 했다.
얼떨결에 그래피티를 하게 되었지만, 얻어 걸린 건 많았다. 일단 재밌었다. (놓칠 수 없지.)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건 그래피티를 하던 선배들과 친구가 나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동아리에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선배와 친구가 있었다. 좀 놀랐다. 미대는 예중과 예고를 나와서 꾸준하게 준비한 애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인문계 고등학교 나와서 미대를 가기에는 실력 면에서 경쟁력이 없는 줄 알았는데 보고 자극을 많이 받았다.
당시 막연했던 나의 진로가
한순간 뻥 뚫리는 느낌을 받으며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엄마를 끈질기게 졸라서 친구가 다니던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기는 했지만 6학년 때의 트라우마가 남아서 순수미술을 할 자신은 없었다. 그나마 좀 먹고살 수 있을 거 같은 디자인 전공을 지원하기로 했고 그에 맞추어 입시 준비를 했다.
아빠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우리 집은 내가 6학년일 때보다는 넉넉해졌고 미대를 못 갈 형편은 아니었다. 아빠는 불안했던 것 같다.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아서. 하지만 나는 초등학교 때와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아서 오랜 시간에 걸쳐 끝까지 투쟁(!)했고 결국에는 내 뜻을 관철시켰다. 나는 미술학원을 계속 다녔다.
고등학생 중에 가고 싶은 대학과 학과가 뚜렷한 학생이 드물었는데 나는 그 드문 학생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내가 부모님을 설득하여 성취한 나의 권리가 자랑스러웠고 나의 열정은 불타(!) 올랐다.
미대 입시와는 별개로 사적인 감정의 표현 수단으로 그림을 정말 많이 그렸다. 늘 스케치북을 들고 다녔고, 그래피티 초안도 많이 그렸고 그냥 그림 일기도 많이 그렸고 주변 친구들도 많이 그려줬다. 감정적으로 가장 예민했던 시기라 감당하기 힘들었던 사춘기 시절의 혼란도 그림으로 많이 남겼다. 미술학원을 다니며 만났던 친구들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친구들과 입시 미술 말고도 함께 그림을 많이 그리며 공유하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내가 원했던 대학과 학과를 들어갔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내가 원하는걸 얻은 순간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다. 대학을 들어가보니 그림을 잘 그리는 애들이 너무너무너무 많았다. 내가 그린 그림들은 어디 내밀 것도 안됐다. 부끄러웠다.
그림 그리는 건 과제로만 했다. 그려야 하는 그림만 그렸다. 내 취미는 더 이상 그림 그리기가 아니었다. 대학 입학 이후 10년 가까이 그림을 끊고(?) 살았다.
그러다 몇 년 전,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 이야기를 들으며 혼란에 빠졌다.
고3 때 짝이었던 한 친구는 내가 그림 그리는걸 부러워했었다. 그 친구 그려준 적도 있었는데 그걸 지금도 기억하며 너무 좋았고 고마웠다고 했다. 그 친구는 대학에 들어간 후 그림을 꾸준하게 취미 생활로 삼았다. 그걸 10년 가까이 했고, 지금은 아마추어 치고 꽤 잘 그린다. 내가 10년 쉬고 있을 동안 이 친구는 꾸준하고 무섭게 그 길을 걸었고, 심지어 그림 그리는걸 정말로 즐기고 좋아했다. 충격.
미술학원을 같이 다니던 두 번째 친구는 오랜만에 만났었는데 전시회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냥 틈틈이 그려온 그림들로 친구들끼리 전시를 한다고 했다. 너는 아직 그림을 계속 그리는구나, 너무 보기 좋다.라고 내가 말했다. 친구는 아이러니하다고 했다. 그 영향을 나에게 받은 거라고 했다. 그 친구는 미술학원을 다니기는 했지만 일상적으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고 했다. 근데 내가 맨날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다니는걸 보면서 영향을 받은 거라고 했다. 홍대 호미화방에서 내가 이 스케치북이 좋다며 추천해줬던 기억도 난다고 했다. 또 충격.
비슷한 시기에 이 두 얘기를 들으며 다시 그림을 그리려고 시도했지만 몇 번 끄적거리고는 잘 되지 않았다.
작년에 같은 과 친구가 '30일 드로잉'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친구는 30일 동안 새로운 걸 시도하라는 TED 강의를 듣고는 크게 감명을 받고 30일 동안 꾸준하게 그림을 그려 보기로 마음 먹고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었다. 참여 방법은 간단했다.
1. 자기소개 및 시작 날짜, 종료 날짜 게시글 올리기.
2. 하루에 한번 이상 드로잉 사진첩에 업로드. [day1] [day2] [day3].... [day 30]
3. 드로잉 못 그린 날은 핑계 글이라도 올리기.
4. 종료 날짜에 본인의 성공을 축하하는 게시글 올리기.
5. 시즌2 ..시즌 3... 시작.
관심이 생겨 나도 참여했다. 처음에는 잘할 수 있을까 했는데 누군가가 내 그림을 보며 반응을 해준다는 것, 그리고 꾸준하게 할 수 있는 명분과 책임이 있다는 것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30일을 매일 그려보니, 결론은 할만하다는 거였다.
그 이후로 꾸준하게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그냥 끄적끄적 그린다. 그때처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는 건 아니지만,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매스케치에서 숙제에 언제나 1일 1스케치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그림 그리는걸 좋아한다. 많이 돌아왔지만 돌아온 만큼 더 절실히 깨달았다. 정말 좋아한다고. 더 늦지 않게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물론 이러다 말고 사는데 치여서 자의로 혹은 타의로 또 안 그리고 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든 다시 돌아올 거 같다. 나중에 나이가 들었을 때 나의 모습을 상상할 때 이런 저런 취미 중에 그림 그리는 건 남아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그림 그리는 스킬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주변에 그림 잘 그리는 친구들이 워낙 많고 심지어 일러스트 작가로 먹고사는 친구들과 후배들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그리는 그림이 못생긴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린다.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가창력이 기가 막힌 사람들을 보며 우와 대박, 하기도 하지만 그냥 소소하고 잔잔하게 불러도 진정성 있게 부르면 그 또한 감동을 주고 거기에 매력을 느끼듯이 그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림 그리는 스킬이 기똥차게 대단해도 별로 매력이 없는 경우가 있다. 근데 그냥 못생기게 그려도 웃음이 나고 정감 가고 계속 보고 있게 되는 경우도 많다.
나는 스킬이 좋은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매력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진솔하게 자기 얘기를 하다 보면 조금 못 그려도 따뜻한 그림이 된다.
야매스케치를 구독하고 따라 하는 사람들도 모두 그런 매력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 교육을 초등학교 때부터 받지 않았어도, 미대를 나오지 않았어도, 그림은 누구나 솔직하게 그릴 수 있다.
몇 주 몇 달 한다고 해서 갑자기 테크닉이 확 늘지는 않는다. 그건 보장해줄 수 없고 아마 읽는 사람들도 바라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함께 꾸준하게 그림을 그리는 습관을 들이고 약간의 기본적인 문법을 배우는 것. 그 정도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동기부여는 셀프지만, 조금의 도움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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