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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디 Oct 06. 2019

미대 출신은 그림을 잘 그릴 거라는 편견

그리고 그 편견 때문에 그림과 멀어졌던 우리

미대를 나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쉽게 뱉는 이야기는 나 그려줘, 우리 집 강아지 그려줘, 여자친구 그려줘 등. 그림을 잘 그릴 거라는 전제로 이야기한다. 근데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주자면, 미대를 나왔다고 해서 다들 그림을 잘 그리진 않는다.


미대생, 혹은 미대 출신은 그림을 잘 그린다는 오해와 편견은 미대생에 대한 고루한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제 이 이미지를 재정의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앞치마 두르고 이젤 펴서 큰 도화지나 캔버스에 촤촤촤-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 그러나 미술의 영역은 넓어지고 관련 전공은 다양해지고 시각적으로 풀 수 있는 게 손으로 그리는 그림 외에도 정-말 다양해졌다. 그래서 미대를 나왔다고 꼭 그림을 잘 그리진 않는다.


믿기 어려울 수 있다. 미대 나와서 그림을 못 그릴 수가 있다고? 대학은 어떻게 갔어? 실기 봐서 들어가지 않아? 그림 좋아서 미대 간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생각의 흐름이다.


변명을 좀 하자면,

1. 실기시험을 안 보고 미대를 갈 수 있다. 많은 대학이 아직 실기 시험을 보지만, 비실기 전형도 많이 늘었다.


2. 입시미술은 딱 시험용 그림만 공식처럼 잘 그린다. 그리고 입학하면 까먹는다. (고3 때 외운 수학 공식을 더 이상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3. 입학 후에는 회화 전공자 말고는 의외로 그림 그릴 일이 없다. 나는 학교 과제를 늘 도화지가 아닌 노트북으로 했다. 지나가던 사람은 내 노트북 화면을 보기 전까지 내가 미대생인지 공대생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을 거다.


4. 졸업 후에는 그림 그릴 일이 더 줄어든다. 그림으로 먹고사는 작가(회화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원화가, 웹툰 작가 등등) 제외하고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커리어가 거의 없다.


암튼, 미대 나와서 그림을 못 그리는 건 그럴 수도 있는 거고 잘 그리는 건 지금까지 손을 놓지 않고 노력해서 그런 거지 당연한 건 아니다.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미대를 갔지만, 미대 진학 이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을 점점 그리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까지는 내가 그림을 꽤 잘 그린다고 자부했는데 대학에서 날고 기는 친구들을 보며 기가 죽었던 것 같다. 미대생은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 안에 스스로 갇혔던 것 같다. 점점 자신이 없어져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는 굳이 그리지 않았다.


그러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일이 없는 커리어를 몇 년째 쌓던 어느 날, 손 그림이 그리워졌다. IT기업에서 하이엔드의 디지털 트렌드를 쫓을수록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다시 시작했을 때는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어져서 다시 그림이 재미있었다. 난 어차피 그림을 잘 그려야 하는 길을 택한 사람은 아니니까. 나는 UX 디자이너니까. 그림 좀 못 그려도 되니까.


누군가 속으로 내 그림을 평가한다고 해도 어차피 취미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내 그림에 꼭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컨셉이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버리니 그림을 시작하는 게 쉬워졌다. 내 작품을 설명할 때의 금기어인 "그냥 예쁘니까" "그냥 하고 싶어서"를 이유로 그림을 그려도 상관없었다. 이런 생각이 나를 자유롭게 했고 다시 그림을 즐길 수 있게 해 줬다.


이번에 낸 나의 책 <오늘부터 그림>은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 없는 초보자를 위한 가이드북이다. 그렇지만 미술/디자인을 전공한 주변에서도 공감을 많이 해주었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들을 많이들 털어놨다. 미대 출신은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는 편견에 오랫동안 갇힌 것 같아서 그림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고.


그래서 다시 한번 강조해본다. 미대 출신이라고 그림을 잘 그리진 않는다. 그 틀 속에 갇히지 말자.




혹시 그 책이 궁금하다면,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부터 그림> 출간 소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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